너무 열심히 살지 않아도 괜찮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피곤한 우리 삶을 위로하기 위해서 그들은 우리에게 '현재를 즐겨도 괜찮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선택할수록 어딘가 공허한 건 왜일까?
이 글은 열심히 살지 않아도 괜찮다는 생각에 너무 익숙해져 버린 사람에 대한 글이다. 먼 미래를 위해 너무 애쓰기보단 지금 당장의 작은 행복을 추구하는 삶에 많은 사람들이 매력을 느낀다. 그러나 많은 걸 바라지 않고 적당히 살자는 마음이 어떻게 삶을 가볍게 만드는지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스타트업에서 일하는 동안 야근이 너무 많았다. 퇴근하고 집에 와서 씻으면 항상 밤 열한 시, 열두 시였다. 잠깐 누워서 핸드폰을 조금 보면 서둘러 잠들어야 하는 시간이 되어있곤 했다. 그나마 야근이 적은 날이 그랬고, 일이 많은 날에는 집에 와서도 새벽까지 노트북을 두드리다가 잤다. 쳇바퀴 같은 하루가 반복되면서 나는 번아웃이 오는 걸 막을 수 없다.
밀레니얼 세대인 나에게 소소하고 행복한 일상은 그래서 소중했다. 먹고사는 게 아무리 중요해도 무조건적으로 현재를 희생하며 살고 싶지는 않다. 지금 당장의 불행을 담보로 먼 미래의 행복을 바라는 건 기성세대가 살아온 방식이다. 소소하더라도 확실한 행복들을 챙기면서 현재의 행복에도 충실하게 살고 싶었다. 연봉을 조금 양보하더라도 일상의 작은 행복들 정도는 누릴 수 있는 삶이 더 끌린다.
라고 생각했었다.
밀레니얼 세대에게 카르페디엠은 익숙한 말이다. 가족을 위해, 국가를 위해 포기하고 희생하는 게 미덕이었던 기성세대와 다르게, 밀레니얼은 어려서부터 자기 자신의 삶이 중요하다고 들어왔다. 그리고 기성세대조차 남은 생을 계속 희생하며 살기보단 자기만의 삶을 살고 싶어 한다. 그야말로 지금 시대정신은 '현재를 즐겨라'다.
하지만 기성세대에는 없던 문제가 밀레니얼 세대에서 나타나고 있다. 무기력이 그것이다. 동기 부여가 되지 않아서 더 노력하지 않고 무기력하게 사는 밀레니얼이 늘어난다. 저성장 시대에 결혼이나 육아, 내집마련은 점점 더 먼 이야기가 되어가고, 그 와중에 양극화는 나날이 심해진다. 힘들게 노력한다 해도 미래가 깜깜하니 열심히 할 맛이 나지 않는다.
밀레니얼에게 카르페디엠은 다른 의미로 해석되기 시작했다. 많은 노력과 희생이 필요한 가치들을 포기하고, 지금 당장의 행복을 챙기면서 살자고. 나 또한 그랬다. 매일 야근하며 밤늦게 집에 들어와 사소한 취미 즐길 에너지도 없이 사는 게 무슨 의미인가, 그런 생각을 매일 했다. 힘들어도 감수하는 것과 지금 당장의 안락함 사이에서 갈등했다. 미래의 결혼이나 내집마련을 포기하더라도 지금의 행복한 일상을 유지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현재를 즐기지 않으면 이렇게 사는 게 무슨 의미인가? 카르페디엠은 그런 의미로 다가왔다.
인간은 자신의 고통을 설명하기 위해 고통의 이유를 찾는다. 그렇지 않고서는 견디기 힘드니까. 무엇을 위해 사는지 아는 건 그래서 중요하다. 지치고 고된 하루를 설명할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이다.
지금의 힘든 나날을 굳이 왜 견뎌내야 하는가?
나는 왜 죽지 않고 오늘을 또 살아내야 하는가?
아침에 눈을 뜨며 나는 왜 다시 힘을 내야 하는가?
만약 삶의 이유를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납득하지 못하면 '살아있으니까 사는' 하루가 반복된다. 이제 그들은 그냥 고통스러움을 견디며, 고통을 극복하려고 딱히 노력하지도 않는 적당한 삶을 반복한다.
많은 사람들이 '행복하기 위해서' 열심히 산다고 대답한다. 밀레니얼 세대도 기성세대도 그렇다. 그리고 요즘은 '먼 미래의 행복'보다 '지금 당장의 행복'이 이기는 시대다. 지금 당장의 행복을 위해 사는 사람이 점점 더 늘어나고 있다.
밀레니얼의 무기력은 여기서부터 시작한다. 왜냐하면 '지금 당장의 행복'은 고통을 위로할 수는 있어도, 설명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왜 굳이 고통을 감수하며 열심히 살아야 하는가? 지금 당장 행복할 수 있는데. 오히려 고통을 부정하고 회피하는 사고방식에 가깝고, 왜 힘들게 노력해야 하는지 제대로 된 이유를 찾지 못한다. 그렇게 계속 단기적인 행복으로 스스로를 위로하려 한다. 하지만 여전히 힘들게 살아야 하는 삶의 이유는 없다. "그냥 즐기자!"
지금 당장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은 많다. 조금 더 나태하고 안락하게 살 때의 행복이 있다. 전기장판에서 늦잠 잘 때의 그 안락함, 사고 싶지만 조금 비싼 물건을 Flex 해버릴 때(사치스럽지만 그냥 사버릴 때)의 쾌감, 주말에 친구들 만나서 술 마시고 놀 때의 정겨움 등등.
먼 미래의 행복을 위해 포기해야 할 수도 있었던 가치들이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운동을 한다든지, 사고 싶은 것도 사지 않고 절약해서 돈을 모은다든지, 주말에 놀고 싶은 거 참고 자기 계발을 한다든지 말이다.
지금 당장 취할 수 있는 행복들은 큰 노력이 필요하지 않다. 먼 미래의 행복을 위해서는 무언가 욕구를 참고, 고통을 이겨내며 노력해야 하지만 지금 당장의 행복은 그렇지 않다. 더 노력해야 할 필요가 없는 행복이다. 뭔가 더 해보려 하지 않고 무기력하게 지금 당장의 행복에 만족하는 삶이 시작된다.
하지만 살아가는 동안에는 끊임없이 뭔가 문제에 맞닥뜨린다. 그리고 그 문제를 극복해나가는 과정은 대부분 고통과 시련을 동반한다. 그걸 본인이 고통/시련이라고 느끼지 않더라도 그렇다. 지금 당장의 행복을 얻는 것에도 노력이 필요하다. 부잣집에서 태어났으면 상대적으로 쉬울지 모르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제한된 사회경제적 지위를 획득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 과정은 절대 편하고 안락하지 않으며, 점점 더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다.
이런 사회 속에서 밀레니얼의 카르페디엠은 자기모순에 빠진다. 고통을 피하기 위해 지금 당장의 행복을 추구하지만, 고통은 피할 수 없다. 이 고통을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위로는 '건물주가 되어 일 안 하고도 안락하게 살 수 있을 때’까지만 참는 것이다. 그때까지만 고통을 참아내면 더 이상 힘든 일은 없을 것 같다. 사고 싶은 거 사고, 먹고 싶은 거 먹을 수 있는 물질적 조건을 갖추는 게 그렇게 삶의 목표가 된다.
하지만 이게 웬걸, 크게 노력하지 않아도 이러한 행복은 지금 당장 얻을 수 있다. 왜 굳이 그렇게까지 노력해야 하는가! (건물주 되기가 얼마나 힘든데!)
건물주가 되지 않아도 먹고 싶은 건 먹을 수 있다. 지금 당장 돈을 조금 더 쓰면 된다. 다음 달 카드값이 조금 더 나오더라도 '시발비용'으로 지불하면 된다. 회사 생활에 스트레스받고 야근도 힘들지만 그냥 미래를 조금 포기하고 현재를 소비하면 된다. 그냥 조금만 노력하면 쉽게 얻을 수 있는데, 건물주가 되기까지 그 험난한 과정을 왜 견디는가? 그냥 지금보다 조금만 더 노력하며 그저 그렇게 사는 거다.
거기서 무기력이 온다. 지금 당장의 행복은 고통의 이유를 설명하지 못한다. 내가 왜 고통을 감수하는지 설명하지 못한 채로, 지금 당장 고통을 잠시 잊을 수 있는 사탕을 먹을 뿐이다. 딱히 크게 노력하며 애쓸 필요도 없다. 건물주가 될 필요도 없다. 지금도 그냥저냥의 소소한 행복들은 상대적으로 쉽게 얻을 수 있으니까.
무기력한 사람은 목표가 없고 목적만 있는 인생을 산다. 그들은 행복하기 위해 사는 것이기 때문에 지금 당장 목적을 실현할 수 있는 삶을 택한다. 더 큰 행복이라는 '목표'를 세우기보다는 '목적' 자체에 충실하게 사는 것이다. 하지만 행복이라는 목적은 불행이라는 현실을 설명할 수 없다. 목적에 반하는 불행을 없애려고만 노력할 뿐이다.
삶의 목표가 있다면 고된 현실을 설명할 수 있다. 고통과 시련은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극복해야 하는 장애물이 된다. 내가 왜 이 고통과 시련을 견뎌내는가?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다. 고통스러운 현실을 설명할 수 있는 합리적인 근거가 생기고, 내 하루하루를 설명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인간은 대부분 삶의 목적에 맞는 목표를 세운다. 당연한 이치다. 현실에서 뭔가 원하는 바를 달성하려면 그에 맞는 목표를 세우고 실천해야 한다. 모든 인간은 세상에 태어나서 크고 작은 목표를 세운다. 초등학생도 또래의 놀이에서 이기기 위해 고민하고 노력한다.
지금의 무기력한 세대는 N포 세대로 살면서 후천적으로 그런 목표를 포기하는 데 익숙해져 왔던 거다. 그런 시대니까.
사회구조적으로 점점 더 뭔가 달성하고, 얻어내기 어려워지고 있다. 알아서 10%씩 성장하고 대학 졸업장만 있으면 취업하는 시대는 끝났다. 부동산 하나 쥐고 있는 사람은 월급으로 절대 따라잡을 수 없는 속도로 돈을 번다. 목표를 크게 잡고 싶어도 잡기 싫어지는 사회가 점점 더 악화되니까 목표지향적인 삶의 태도 자체를 포기하게 된다. '노오력이 부족해'라는 말이 욕을 먹는 이유는 이러한 사회구조적 문제를 제쳐두고 개인에게만 책임을 묻기 때문이다.
무기력해진 사람들은 목표지향적인 삶의 방식 자체를 포기한다. 무기력자의 카르페디엠에는 '먼 미래의 행복을 목표로 삼지 않고 포기할래'라는 자포자기한 감정이 숨어 있다. 목표를 설정하고 고통을 감수하며 노력하는 행위 자체가 진절머리 나는 것이다. 카르페디엠의 어두운 이면에 빠져들수록 단기적인 쾌락과 안락함을 추구하고, 고통스러운 삶은 여전히 설명하지 못한 채 마냥 고통스러워만 한다.
'너무 치열하게 살지 마라', '노력하지 말고 적당히 즐겨라', '현재의 행복을 즐기면서 살아라'라고 부추기는 책들이 있다. 그런 책들은 우리에게 큰 위안을 준다. 절망스러운 현실에 공감해주기 때문이다. 치열하게 살아도 행복하기 어려운 시대가 맞다고 그들은 우리를 위로한다. 그러니까 지금 더 행복을 챙기라고 달콤하게 속삭인다. 현대인에게 꼭 필요한 휴식이자 힐링이기도 하다. 하지만 '휴식'이 삶의 목적이 되어선 안 된다.
무기력한 밀레니얼에게 필요한 건 휴식이 아니라, 오히려 목표를 설정하고 노력하는 일이다. 노력의 가치를 폄하할수록 손해를 보는 건 나 자신이다. 노력을 포기하고 지금의 단기적인 행복을 추구하면 삶이 무기력해진다. 노력할 필요 없이 지금 당장 취할 수 있는 행복들만 취하다 보면, 피할 수 없는 고통들을 절대로 설명할 수 없다. 그냥 고통은 자연스러운 일이고 견뎌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며 무기력하게 작은 행복들만 취하면서 살아가게 된다. 요즘 시대의 무기력은 바로 그 지점에서 생겨난다.
2000년대 초반에는 '열정, 꿈, 노력'이라는 단어들이 유행했다. 청년들이여 도전하라고, 하고 싶은 걸 하라고, 열정을 가지고 노력하라고 온갖 미디어들이 외쳐댔다. 그러나 저성장 시대에 양극화가 심해지면서 '열정, 꿈, 노력'이라는 단어 자체가 부정적인 뉘앙스를 갖게 되었다. 천 번을 흔들리기는 개뿔, 아프니까 청춘이긴 개뿔, 이런 뉘앙스가 번지면서 열정, 꿈, 노력이 우리 삶 속에서 조금씩 지워졌다. 하지만 보라, 자포자기하며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만 추구하는 삶이 얼마나 쉽게 무기력해지는가. 삶의 무게가 얼마나 가벼워지는가.
이 글은 사회문제를 비판하기 위해 쓴 글이 아니다. 노력해도 극복할 수 없는 구조적인 격차를 없애도록 사회적 차원에서 분명히 노력해야 한다. 하지만 그 과정은 지지부진하고 굉장히 오래 걸릴지도 모른다. 그렇게 사회가 점진적으로 변하는 동안에도 삶의 모순을 겪게 되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 안에서 살아내려면 더 적합한 삶의 방식을 각자 찾아야 한다.
카르페디엠이나 소확행, 분명히 중요하다. 이런 사회일수록 더 중요하다. 기성세대가 배운 교훈을 그대로 답습하지 않으려면 우리도 나름대로 지금의 행복을 찾으며 살아야 한다. 스트레스 가득하고 끝없이 경쟁하는 삶을 지양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문제는 달콤한 유혹에 빠져 선을 넘게 되는 게 문제다. 고통과 시련을 무조건적으로 회피하고 달콤한 당장의 행복만 추구하는 삶의 방식은 우리를 위기에 빠트린다. 무기력하고 삶의 동기 부여가 하나도 안 되는 사람이 생겨나는 건 이 때문이다. 미래가 보장되지 않는 사회를 살고 있다고 해서 미래를 포기해버렸을 때 손해 보는 건 나다. 목표를 세우지 않고 지금의 행복과 안락함을 추구하면 노력이라는 행위 자체를 조금씩 멀리하게 된다.
결국 지금 당장의 행복을 선택해서 대가를 치러야 하는 사람은 나와 내 주변 사람들이다. 노력하지 않는 생활을 자주 선택할수록 피해는 눈덩이처럼 커진다. 노력하지 않는 삶의 방식, 지금을 즐기는 방식에 관대해질수록 후회는 커진다. 결국 노력하지 않으면 죽는다. 노력하지 않으면 삶이 비루해진다. 사회가 어떻든, 무슨무슨 구조적 문제이든 간에 노력하지 않으면 그 피해는 내가 본다.
목표를 위해 노력하는 삶을 포기하도록 종용하는 콘텐츠들에게서 위로는 받을지언정, 해답을 얻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힐링 콘텐츠들은 현대사회를 건강하게 살기 위한 수단 중 하나다. 가치가 전도되어 힐링 자체가 삶의 목적이 되지 않도록 우리는 경계해야 한다. 그게 이 글의 요지다.
한 번씩 스스로에게 되물어보면 어떨까. 왜 열심히 사는가. 각자 자기만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누군가는 사랑하는 사람과 행복하게 살기 위해, 누군가는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누군가는 이루고 싶은 꿈을 위해서 열심히 산다. 열심히 사는 이들은 견뎌야 하는 고통과 시련의 무게에 걸맞은 책임을 짊어지고 있다. 자기 삶에 대한, 혹은 사랑하는 다른 사람에 대한 책임감으로 힘든 하루를 견뎌낸다.
소소하고 행복한 일상은 우리 삶에서 분명히 중요하다. 일상이 무너지는 경쟁 사회 속에서는 더더욱 중요하다. 그러나 삶의 무거운 무게추 반대편에 매달기에는 너무나 가볍다. 왜 열심히 사는가? 소소하고 작은 행복과 늦잠을 위해서? 비싼 음식을 더 먹기 위해서? 더 안락하고 편안한 삶을 위해서? 조금 더 비싼 물건을 부담 없이 구매하는 즐거움을 위해서?
고되고 지친 하루를 견디기 위해선 그에 걸맞은 무게의 목표와 책임감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냥저냥 만족하고 사는 삶의 방식은 쉽게 무기력해진다. 너무나 가벼워서 지금 당장 만족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무기력하지 않고 더 생동감 있게, 더 가치 있게 살고 싶다면 고통과 시련, 포기와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 그것들을 없애고 피하기 위해 사는 게 아니라, 그것들을 극복하고 그 이상의 무언가를 위해 살고 싶다면 말이다.
나는 왜 열심히 살아야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