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국화 Nov 29. 2020

의심

Clair de Lune - 숙제 2


믿지 못한다 아니 믿지 않는다. 인간은 대체로 악하지만 그는 절대 악에 가깝다. 내가 경험한 그는 아주 여러 개의 얼굴을 가졌다. 전혀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가 대체로 알 것 같은 얼굴을 반복하고 있다. 저 많은 얼굴들은 어디에서 분열된 것일까? 저 얼굴 속에 진짜가 있을까? 내가 보지 못한 얼굴이 얼마나 남은 걸까? 금지된 질문을 품은 나는 그의 악에 포위된 채 오랫동안 영혼을 받쳤다.


태어나 줄 곧 하나의 얼굴로 살았던 나는 불면에 시달렸다. 하나의 얼굴로 사는 것도 고통이라면 고통이었다. 인간이라기보다 얼음에 가까웠다. 다 녹아내려 사라지고 싶었다. 제물로 받친 영혼이 탈진해 과호흡이 왔다. 온몸에 난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그가 거미줄을 쳤다. 먹이가 된 나는 다시 얼었다. 호흡이 돌아왔다. 그가 갖은 여러 개의 얼굴 중 어떤 것은 훔치고 싶었다. 슬프게도 하나의 얼굴을 갖은 내게 허락되지 않는 욕심이었다.


자정에 가까워지면 그의 방에서 드뷔시의 달빛이 새어 나왔다. 내가 모르는 얼굴로 그가 피아노를 연주하는 모습을 상상했다. 어떤 얼굴일까 궁금했다. 어제와 오늘 사이. 작고 연약하게 시작된 피아노 소리가 크고 선명해졌다. 그 시간만큼은 얼음이어도 좋겠다고 착각에 빠졌다. 귀로 하는 마약이 있다면 이런 모습일 거라고 생각했다. 내가 갖는 유일한 희망이었다. 무서웠다. 내 희망의 근원지가 그의 절대 악이라면. 하나의 얼굴로 살았던 나는 누구였을까? 내가 그어둔 금을 밟았다.


여러 개의 얼굴 중 그가 선善에 가까웠을 때 나는 더 얼었다. 그가 웃었다. 나는 더 차갑게 얼었다. 그가 물었다. 그의 물음에 나는 서서히 녹아내리는 줄 알았다. 아니. 착각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수많은 파편이 되어 무참히 깨지는 중이었다. 하나의 얼굴이었던 나는. 사라지는 중이었다.






#안 써 본 글 써보기

#내 맘대로 1분 소설







작가의 이전글 어떤 의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