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맘대로 펼쳐보는 올드팝송
Sung by Animals
There is a house in New Orleans/ 뉴올리언스에 집이 한 채 있어요
They call the Rising Sun/ 사람들은 해 뜨는 집이라고 부르죠
And it's been the ruin of many a poor boy/ 그곳은 많은 가난한 소년들이 피폐해진 곳이었어요
And God, I know I was one/ 저, 있잖아요, 저도 그런 아이였어요
이 곡은 첫 소절 기타 선율을 듣자마자 무조건 아련함을 장착하게 된다. 우리나라에는 “달” 뜨는 것을 가장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산중턱 달동네가 있다면, 미국 슬럼가 중에는 “해” 뜨는 것을 가장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곳도 있나보다. 달동네건, 해 뜨는 집이건, 동양의 우수와 서양의 우울이 묘하게 교차되는 분위기가 있다. 달동네는 적어도 우울함이 와닿지는 않는다. 가끔 보름달이라도 뜨는 밤이면 가슴 한편에서 희망의 불을 켤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해 뜨는 집은 아침의 눈부신 해가 가난에 찌든, 구멍 난 회색빛 슬레이트 지붕과 갈라진 벽 틈을 쨍하게 비추면서, 상대적으로 가난이 환하게 드러날 수밖에 없다. 달밤이면 달그림자 늘어진 곳에 마음이라도 숨길 수 있지만, 햇빛은 피할 수가 없다. 그래서 가수 ‘비’도 <태양을 피하는 방법>을 불렀을까? 쏘리.
태양은 자비가 없다. 꽁꽁 숨겨진 것들을 다 드러내고야 만다. 이창동 감독님의 영화 <밀양>에서도 영어 제목을 <Secret Sunshine>으로 붙여, 배경 장소로서의 ‘밀양’ 뿐만 아니라, “태양을 감추다”는 중의적 의미를 깔아놓았다. 이 영화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부분은 마지막 엔딩 장면이다. 집 마당에 있는 그저 흔한 수돗가를 카메라는 무심한 듯 보여준다. 응달진 곳에, 가까스로 한 줌 햇살이 조금 비집고 들어와 있는 장면을, 카메라는 오래도록 잡고 있었다.
물론 <밀양>에서의 햇살과, <해 뜨는 집>에서 햇빛이 갖고 있는 상징은 그 결이 다르다. 우리말에서도 ‘햇살’과 ‘햇빛’은 쓰임새가 엄연히 다르다. 햇살은 축복이지만, 햇빛은 은하계의 왕좌인 태양의 무차별적인 빛을 말한다.
이런 무자비한 태양빛 아래 자라난 가난한 아이들은 마음마저 사막처럼 쩍쩍 갈라진 채 살아가기 쉽다. 경제적인 가난을 정서적인 가난과 뭉뚱 거리는 것은 참으로 위험한 짝짓기임에도 불구하고, 이 곡의 화자는 자신이 그렇게 피폐한 삶을 살았노라 고백한다.
My mother was a tailor/ 어머니는 재봉사였어요
She sewed my new blue jeans/ 바느질로 새 청바지를 만들어 주셨지요
And my father was a gambling man/ 아버지는 도박꾼이었구요
Way down in New Orleans/ 거기 뉴올리언스에서요
어머니는 바느질을 하면서 아이들 옷도 손수 만들어주셨던 것 같다. 그러나 대개는 자투리천으로 시침질한 것이거나, 해진 곳에 천을 덧대어 리폼한 것이었으리라. 일하는 도중 틈틈이 아이들 옷을 만들면서, 그 어머니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이렇게라도 해서 자식들에게 옷을 입힐 수 있음을 다행으로 여겼을까, 아니면, 때깔 좋은 유행 신상을 못 사주는 현실을 마음 아파했을까.
나는 30여 년 전 엄마가 어깨 통증까지 얻어가며 짜주신 보랏빛 겨울 스웨터를 지금도 간직하고 있다. 아들에게는 그나마 쉬운 목도리를 짜주셨지만, 딸에게는 작품 수준의 스웨터를 만들어주고 싶으셨으리라 생각한다. 늦가을에 시작한 스웨터는 틈만 나면 등판을 대며 치수를 재고 콧수를 헤아리시더니, 겨울이 거의 끝나갈 무렵 완성되었다.
지금 같으면 엄마표 스웨터를 매일 입고 다니면서 엄마를 기쁘게 해 드리련만, 철딱서니 없이 겉멋에 취해있던 그 시절에는, 정성은 알아드릴게, 식으로 몇 번 입고는 고이 모셔두었다. 그러다 몸에 안 맞는 옛날 옷을 어지간히 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엄마가 한 달 이상을 고생하면서, 엄마 향이 고스란히 배어있는 그 스웨터만큼은 버릴 수가 없었다. 옷은 버리되, 추억은 버릴 수 없다지만, 그 옷은 추억 자체가 되었기 때문이다.
다시 노랫말로 돌아와서, 왜 가난한 집이 피폐함에서 벗어날 수 없는가 하면, 거기엔 거의 대개 빌런이 있기 때문이다. 화자의 엄마가 억척스럽게 바느질로 생계를 이어가는 반면, 아버지는 도박꾼이었다. 도박은 술 담배와 폭력을 동반할 수밖에 없는 구조가 아니던가. 도박꾼들은 자기 성격이 원래는 그렇지 않았다고들 말하지만, 모든 중독에 더하여, 돈에 대한 비뚤어진 욕망까지 끼어있기에 도박은 가히 중독의 종합판이라 할 수 있다.
And the only thing a gambler needs/ 도박꾼에게 필요한 유일한 물건은
Is a suitcase and a trunk/ 여행 가방과 트렁크예요
And the only time he's satisfied/ 그가 만족하는 유일한 순간은
Is when he's a drunk/ 자신이 술에 취해 있을 때뿐이지요
화자의 아버지는 걸핏하면 집을 나가있기 일쑤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엄마에게 돈 구해오라는 압박을 일상적으로 가했을 것이고, 어쩌면 아이들을 대놓고 팼을 수도 있다. 머릿속에는 수단방법 안 가리고 어떻게든 돈만 구하면, 담배에 절어있는 도박꾼들 사이에서 판돈을 다 휩쓸어 올 수 있을 거라는, 얼토당토않은 상상만 가득했을 것이다.
다시는 도박하지 않겠노라고 스스로 손을 자른 사람이 다음날, 발로 도박하더라는 우스개 소리도 있다. 일단 도박에 맛 들이게 되면 가장 가까운 가족부터 옳아 매고, 다음으로 친척과 지인에게 올가미를 던진다고 한다. 도박빚이라고 대놓고 밝힐 수 없으니, 사기를 치게 되고 그게 또 얼마 못 가 들통날 수밖에 없다. 개인의 파멸과 함께 가족까지 깊은 나락으로 떨어진다. 이런 사례는 막장 드라마에 반드시 들어가는 에피소드가 아니던가.
Oh, mother, tell your children/ 오, 어머니, 아이들에게 말해주세요
Not to do what I have done/ 내가 했던 짓을 하지 말라구요
To spend your lives in sin and misery/ 죄짓고 비참하게 삶을 낭비하지 말라구요
in the house of the rising sun/ 해 뜨는 집에서
화자의 삶도 아버지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잘못된 모델케이스를, 욕하면서 배운다더니, 아버지처럼 살지 않겠다면서도 결국은 아버지를 고스란히 닮아가는 사례는 흔히 찾아볼 수 있다.
화자 또한 비굴하고 얍삽하게 살면서, 감방에도 들락날락했던 것 같다. 후회는 항상 너무 늦은 법이다. 어떤 일을 하기 전에 결과를 이미지로 그려보면서, 매번 “후회”라는 항목은 왜 빼먹는지 모르겠다. 이 일이 설령 잘못된다 해도 후회하지 않을 일인가를 따져보고, 후회할지라도 할만한 가치가 있는 일인가를 짚어본다면, 그 도전이 얼마나 가치 있을까.
그렇지 않고 눈앞의 이익에만 심지 켜고 덤벼든 일은 대개의 경우, 후회로 가슴을 치게 된다. 내 일을 돌아켜봐도 그랬고, 주변을 둘러봐도 그랬다. 목표 근시안에게는 후회도 가까이 있는 것 같다.
I got one foot on the platform/ 발 하나는 기차 승강장에 두었고
And other foot on the train/ 다른 한 발은 기차 위에 올려 두었어요
And I'm going back to New Orleans/ 뉴올리언스로 다시 돌아가려구요
To wear that ball and chain/ 그 가난의 족쇄를 차겠지요
갈 곳 없는 화자는 뒤늦은 후회를 하면서 결국 고향인 뉴올리언스로 돌아갈 수밖에 없지만, 설렘은 전혀 없다. 비루하고 지긋지긋한 가난이 싫어 뛰쳐나왔는데, 다시 그곳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분명 내키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선뜻 기차에 오르지 못한 채, 한 발은 여전히 승강장을 딛고 있는 것이다.
가난과 죄가 엮여서 대물림되는듯한 그곳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불행했던 과거로의 회귀일 수도 있다. 그곳에 가면 노쇠한 어머니만 구부정하게 저 언덕 아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버지도 분명 당신의 재능이 있었을 텐데, 도박으로 그 숨겨진 재능마저 다 갉아먹고 지금쯤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 가난이 지겨운 동생들도 뿔뿔이 흩어져, 만나지 못할 수도 있다. 다들 떠나간 해 뜨는 집인데, 만신창이가 된 화자는 돌아오려고 한다.
화자는 자신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풀어놓는다. 미사여구 하나 없이, 변명 한 톨 없이, 누구에게 꺼내어놓기엔 부끄러운 이야기일지언정 솔직 담백하게 털어놓는다. 이 부분에서 화자는 더 이상 옛날의 피폐했던 그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자신을 객관화시킬 수 있게된 화자는 파멸의 구렁텅이를 헤쳐 나온 것 같다. 아직 시꺼먼 진흙이 군데군데 마르지 않은 채 묻어있을지라도, 최소한 정신적 피폐함은 극복한 것 같다. 고향에 돌아가면 해 뜨는 집의 지붕도 고치고, 페인트칠도 하면서 콧노래라도 흥얼거릴 수 있다면 좋겠다. 해 뜨는 집에서의 경험치가 고스란히 그의 인생 교과서가 되어, 첫 도입부의 아르페지오 기타선율처럼 그의 삶도 리드미컬하게 이어진다면 좋겠다.
이미지: pixab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