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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지현 Jan 11. 2023

가족이 되는 법

호명산 등산


결혼은 과연 행복의 상징인가. 결혼하기 전엔 안 그랬는데, 하고 보니 결혼이야말로 내가 평생 해왔던 미친 짓 중에 탑이란 생각이 들었다. 결혼하고 지낸 첫 몇 년. 나와 남편은 끝이 보이지 않는 싸움에 지쳐있었다. 싸움이라기보단 전쟁이었다. 매일이 6.25였다.      


이래선 안 되겠다, 이렇게는 못 살겠다, 부부 대화합의 장을 한 번 만들어보자 생각한 나는 등산을 제안했다. 경치 좋은 곳에서 호수도 보고, 예쁜 산길도 함께 걸으면 다시 보송보송한 사랑이 움트지 않을까. 의외로 남편도 흔쾌히 승낙했고, 우리는 가평에 있는 호명산으로 향했다.      


다행히 산 입구에서부터 분위기는 좋았다. 경춘선 상천역에서 나와 만난 시골길, 개천을 지나 사이좋게 산길에 올랐다. 아침 햇빛에 반짝이며 온 산길을 비추는 푸른 나뭇잎, 산책길 옆으로 경쾌하게 흐르는 개울. 1시간 정도 걸으니 만나게 된 호명호수까지. 날씨도 좋고, 기분도 좋고 아무튼 이래저래 좋았다. 호명호수 근처에 있는 카페에서 오붓하게 앉아 팥빙수를 나눠 먹었다. 달달했다.   이제 슬슬 내려갈까, 남편이 제안했지만 내가 욕심을 부렸다. 조금만 더 가면 정상인데 갔다 가자고. 화창한 날씨에, 오랜만에 무르익은 분위기에 취해 우리는 좀 더 걷기로 했다.     


하지만 정상은 꽤 멀었다. ‘호랑이 울음소리’라는 뜻의 호명산을 동네 뒷산 정도로 생각하고 챙겨온 500ml 물병 하나는 진작 동이 났다. 초콜릿 몇 조각은 두 사람의 허기를 달래기엔 턱없이 모자랐다. 아직 정상에 도착하지도 않았는데 목이 타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얇은 손수건은 이미 땀에 젖어 사용할 수 없었고, 어디서 나타났는지 엄청난 모기와 날파리를 쫓느라 바빴다. 모기는 피를 먹고, 다른 벌레들은 내 몸의 어디를 뜯어먹을지 몰라 무서웠다. 땀에 젖은 손수건을 휘휘 돌려가며 모기를 쫓았는데, 땀 냄새 때문에 그들이 더 몰려오는 것 같기도 했다. 모기가 우리에게 달려드는 것인지, 우리가 모기떼 속으로 들어가는 것인지. 목마름과 허기, 곤충과의 전쟁을 치르며 우리는 카페에서 출발한 지 2시간 30분 만에 정상에 도착했다.   

  

몸은 힘들어도 정상에서의 풍경이라도 좋았다면 다행이었을 것을. 맑았던 하늘은 어디 가고, 안개와 구름으로 시야가 좁아졌다. 사진을 찍을 힘도, 정상 등정을 축하할 힘도 없었다. 우리는 빨리 내려가기로 했다. 목도 마르고, 배도 고팠다. 그때, 문제가 하나 생겼다.     


“여보, 무릎이 너무 아파.”     


이렇게 오랫동안 산에 있어 본 적이 없던 남편이 다리 통증을 호소했다. 하산 길에는 유난히 계단길이 많았는데, 그게 무릎에 부담이 된 듯 보였다. 괜찮아, 쉬면서 가자. 나는 그해에 야심 차게 샀던 등산스틱을 배낭에서 휙 뽑았다. 사무라이가 칼을 빼듯, 진지하게. 가방에 곱게 모셔오던 비싼 스틱을 처음 개시했다.     

조심조심 내려가고 있는데 사방에서 콰광!하는 소리가 들렸다. 쿠궁, 우우웅하는 무언가 진동하는 소리도 들렸다. 비행기 소리일 거야. 우리는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또다시 콰광하는 소리가 들렸다. 전투기가 지나가나? 이 동네에 비행기가 많나 보네. 응, 절대 천둥소리는 아닐 거야. 오늘 맑다고 했으니까….     


지구의 날씨를 30년 넘게 겪어온 우리는 마음 깊은 곳에서 이미 알고 있었다. 그 소리는 소나기를 몰고 올 소리라는 걸. 험한 산길에서 서로 안심시키기 위해 말도 안 되는 비행기 얘기를 한참 나눈 걸 생각하면 지금도 조금 우습다. 결국, 우리는 예상하지는 않았으나 오리라 확신했던 소나기에 생쥐처럼 젖었고 나무 밑에 서서 소나기를 피하고 있었다. “그런데, 번개가 칠 땐 나무 밑에 있으면 안 된대.” 그리곤 벼락을 맞을까 걱정되어 소낙비를 맞으며 미친 듯이 산을 뛰어 내려왔다. 오전 9시 30분에 시작한 산행은 오후 3시 30분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 온몸이 쫄딱 젖은 채로. 청평역에 도착하니 어느새 해가 다시 쨍하고 나타났다.      


결혼이 정말 미친 짓인지 이제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둘이서 500ml 생수 하나 달랑 들고 높은 산에 가는 건 미친 짓이다. 미리 계획한 등산 코스를 기분에 따라 바꾸고, 체력에 대한 고민 없이 무리해서 산에 가는 건 정말로 미친 짓이 맞다.      


호명산 사건 이후로 우리는 휴전하게 됐다. 탈수를 겪고, 벼락 맞아 죽을 뻔(?)한 위기를 함께 넘기면서 동지가 됐다. “내가 무릎 아프다고 지체하지만 않았어도 비 안 맞았을 텐데.”, “오빠가 호수에서 내려가자고 했을 때 내가 동의했으면 이런 일이 없었을 텐데.” 우리는 오랜만에 서로에게 미안했고 고마워했다.     

휴전 중에도 가끔 교전이 벌어질 때가 있다. 하지만 호명산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릴 때면, 우리 부부는 매번 다시 인생의 동지가 된다. 위험하긴 했지만, 산에서의 경험이 가족이 된 우리 관계를 회복하는 데 큰 계기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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