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은 단가, 작업자들의 신체 자원을 소모하는 반복적인 작업. 작업의 의도와 용도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한 채 끝없이 이어가야 하는 이 일. 미세 노동이 좀 더 나은 일이 되려면, 작업자 사이의 연대감 같은 게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우선 똑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끼리 채팅방에서 물고 뜯지 않아야 한다. 우리가 하는 작업의 정체를 좀 더 명확하게 해 달라 요구하고 정확한 비용 체계와 정확한 정산 체계를 요구하며 '노동자'로서 요구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하지만 아바타 뒤에 숨어있는 익명의 작업자들이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행여 그런 일을 도모했다간 같은 채팅방에 있는 관리자에 의해 작업 기회를 잃을 수도 있을 것이고.
데이터 라벨링 작업을 하다 보니 라벨러들이 모여 있는 네이버 카페를 하나 알게 됐다. 처음 이 카페를 보고선 약간의 희망 같은 게 생겼다. 여러 사이트에서 동시에 활동하는 라벨러들이 채팅방에서 못하는 이야기를 여기서 충분히 풀어놓을 수 있지 않을까. 작업의 고충도 토로하고 서로 삶에 대한 위안도 주고받으면서 그렇게 연대감이 생기지 않을까. 미세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낼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이 카페가 계기가 되어 미세 노동자들이 좀 더 제대로 된 급여를 받고 처우를 받으며 일할 수 있게 되지는 않을까.
하지만 어느 카페든 만들어진 데에는 의도가 있다. 만들 때 의도가 없었더라도 운영을 하다 보면 의도가 생기곤 한다. 라벨러들이 이야기를 나누던 그 카페는 회원이 늘어갈수록 특정 데이터 라벨링 사이트의 교육과 자격 과정을 홍보하는 홍보의 장으로 변해갔다. 특정 사이트에서 고수익을 올리는 '주부'의 인터뷰를 실어 보내고, 교육 패키지 할인 소식을 전하고, 자격증을 특정 기간 내에 취득하면 고가의 경품을 주는 이벤트도 진행했다.
카페의 상징 같았던 카페 주인의 정체도 의심스러웠다. 어떤 때는 '00님의 라벨러로서의 성공적인 정착을 기원합니다.'라고 했다가 어떤 때는 '00님~ 진짜 진짜 이렇게만 하시면 앞으로 정말 꼭 꼭 성공하실 거예요. 저도 열심히 응원할게요!!'라고 했다. 시기마다, 게시판마다 달라지는 말투에 카페 주인 아이디를 사용하는 이가 도대체 몇 사람인지 궁금해졌다.
사람들은 라벨링 작업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이 카페에 가입한다. 어디에 가면 무슨 작업이 있는지 알기 위해서. 하지만 해당 카페에는 작업의 존재성에 대한 글은 거의 없다. 일부 회원이 자의로 가끔 작성하는 글 이외에는 전무하다. 대신 교육과 자격증이 작업을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것처럼 홍보하고 있다. 교육의 무용론을 펴는 회원들에겐 카페 주인이 직접 나서서 반박을 하기도 하고, 무용론을 격하게 주장하는 회원은 내보내기도 한다. '카페의 운영 의도'와 다른 글을 쓰며 물을 흐리는 경우는 해당 회원을 강제로 탈퇴시키겠다며 무서운 공지를 올리기도 했다.
이쯤 되면 이 카페의 목적은 어느 정도 분명해졌다고 본다. 카페를 만든 사람이 라벨링 사이트 관계자인지, 관계자가 된 건지, 여전히 단순 홍보사인지는 모르겠지만 라벨링 사이트가 주 수입원 중 하나로 선택한 것이 교육이고 자격증이라는 것. 그리고 일 찾아 삼만리, 이 카페를 찾아온 미세 노동자들에게 교육과 자격증을 파는 것이 카페의 주목적 중 하나가 됐다는 것. 요즘 업로드 되는 글을 살펴봤을 때, 미세 노동자들의 커뮤니티로서의 기능은 이미 없어진 것 같다. 다들 회원 등급이 올라가면 무슨 대단한 정보가 있을 줄 알고 글도 많이 쓰고 파이팅도 열심히 외쳤지만, 별 것 없었다. 과거엔 비공개였던 라벨링 시험 엑기스 같은 정보들도 이제는 완전히 오픈되어 있다. 카페 주인에게 해당 시험에 대한 정보는 과거에는 지켜야 할 소중한 지식 자산이었겠지만,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참고해주었으면 하는 자산이 된 것이다. 좀 더 많은 라벨러들이 손쉽게, 부담 없이 시험을 칠 수 있어야 할 테니까.
카페 규모가 작았을 때, 그때는 나도 그 카페에서 동료를 만났다 생각했다. 달리 방도가 없던 내가 어쩌다 찾은 새로운 방도에 신이 났다. 사소한 일에도 장인 정신을 가진 순수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에 감동했다. 많은 사람들이 떠났고, 교육과 자격증 판매글이 그 자리를 채웠다. 이런 카페마저 라벨링 사이트의 손바닥 위에서 굴러가는 것인가. 순수한 의도를 잃은 모임은 언제나 씁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