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를 검색하다가 찾아간 곳,퇴사학교- 아이덴티티 워크숍
‘나는 앞으로 어떤 일을 해야 할까?’라는 질문이 한번 시작되자 꼬리에 꼬리를 물고 쉴 새 없이 떠올랐다.
일을 할 때는 잠시 묻어두다가도 조금이라도 여유가 생기면 또 올라왔다.
이렇게 보내는 하루하루가 모여서 금세 몇 년이 지나버릴까 봐 두려웠고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바깥 풍경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는 좁은 사무실이 유난히 더 답답하게 느껴졌다.
잠시 바람을 쐬고 싶어도 분 단위로 근무시간을 관리하며 사무실에 엉덩이를 오래 붙이고 있는 것이 성실함으로 인정받는 곳에서 업무시간에 짬을 내서 잠시 나갈 수는 없었기에...
업무 중에 문득 답답함이 밀려올 때면 인터넷 검색창을 열고 퇴사를 검색했다.(누가 보든가 말든가!)
지금 생각해보면 그다지 의미 있는 행동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비슷한 고민을 하며 퇴사를 꿈꾸는 사람이 나뿐만은 아니라는 점에서 일말의 위로를 얻을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러다 우연히 알게 된 <퇴사학교> 그리고 이곳에서 진행하는 여러 과정 중, '아이덴티티 워크숍' 이라는 프로그램을 보고 마음이 끌렸다.
두 달간 매주 주말을 할애해야 한다는 점이 망설여져서 몇 달을 고민하던 와중에 둘째 아이를 임신하게 되었고 더 이상은 미루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신청하게 되었다.
둘째 임신 4개월이 조금 넘었던 때라 서울을 오가는 버스 안에서 실신할 뻔하기도 하고 잠이 부족해 돌발성 난청이 올 정도로 컨디션이 안 좋았지만, 더 이상 고민을 미루면 안 된다는 절박한 마음이 있어서 포기할 수 없었다.
아이덴티티 워크숍에서는 크게 두 가지를 얻었다.
1) 나를 관찰하고 이해하는 법
2) 일에 대한 새로운 관점
1) 나를 관찰하고 이해하는 법
지금까지 나에 대해 꽤 치열하게 고민해왔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프로그램을 시작하고 매일 주어지는 질문에 답을 하려다 보니 무척 어려웠다.
새벽까지 머리를 쥐어뜯으며 모니터에 깜박이는 커서만 바라보던 날이 수두룩했다.
예를 들자면 이런 질문이었다.
당신은 언제 행복감을 느끼나요?
이 질문이 프로그램을 시작한 첫날의 질문이었는데 이것부터 답을 하기가 쉽지 않았다.
스스로에 대해 고민했다고 생각한 것과 나를 관찰하는 방법은 다른 것이었다는 것을 이때 많이 깨달았다.
도대체 그동안 뭘 고민했나 싶을 정도로 스스로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나를 관찰하는 방법은 무의식적으로 내가 내뱉는 말, 떠오르는 생각들을 제삼자의 시선으로 다시 한번 바라보는 과정이 필요한 것이었다.
'아, 나는 이런 말을 자주 사용하는구나.'
'나는 이런 것을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구나.'
스스로를 오롯이 마주하는 시간이 일상에서는 생각보다 적다는 것도 이때 처음 느꼈다.
이전에 안 하던 방식으로 생각하려니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두 달 내내 말 그대로 머리에 쥐가 난 듯한 느낌이 들었다.
2) 일에 대한 새로운 관점
나를 가장 충격에 빠뜨렸던 것이 바로 이 부분이었다.
지금까지 내가 생각하는 일이란 특정한 '직업'에 가까운 것이었고, 앞으로 나와 잘 맞는 하나의 '직업'을 찾아서 오랫동안 하면서 장인과 같이 되고 싶다는 것이 막연한 나의 바람이었다. (그래서였을까. 가장 좋아하는 TV 프로그램이 <생활의 달인>이었다.)
그런데 앞서 말했던 나의 바람이 잘못된 생각이었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것을 받아들이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새롭게 정립하게 된 사실은 일은 하나의 직업이 아니며, 내가 도달해야 할 목표가 아니라는 것이다.
직업은 삶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이며 그렇기에 어떤 '직업'을 가지느냐에 무게를 실을 것이 아니라 '왜' 그 일을 하느냐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프로그램에서는 특히 사이먼 사이넥의 '골든 서클' 개념을 이해하고 그 틀에 맞게 나의 골든 서클을 그려보는 작업을 통해 내가 추구하는 삶의 방향을 좀 더 가시적으로 표현해볼 수 있었다.
골든 서클이란?
아이덴티티 워크숍에서 골든 서클을 접한 이후로 나는 골든 서클 예찬론자(?)가 되었다.
골든 서클은 사이먼 사이넥이라는 사람의 TED 강연(<위대한 리더들이 행동을 이끌어내는 법>) 에서 언급된 이론인데, 아래 그림과 같이 중심에 WHY가 있고, 가장 외곽에 WHAT이 있는 형태로 표현된다.
WHY(왜)에서 시작해서 WHAT(무엇을)으로 생각의 방향이 뻗어나가야 하는데, 대부분은 WHAT(무엇을)을 위주로 생각한다는 것이었다.
- WHY(왜) = '자연스러운 최고의 모습일 때 나는 이런 사람이다'라고 표현할 수 있는 것.
- HOW(어떻게) = 나의 행동 방식
- WHAT(무엇을) = 'WHY(왜)'를 실현하기 위한 수단 (직업, 일)
내가 했던 고민인 '어떤 직업을 가져야 할까'라는 고민은 WHAT(무엇을)에 대한 고민이었고, 진짜로 해야 할 고민은 '나는 어떤 사람인가? 어떤 것을 추구하는 사람인가?'라는 WHY(왜)에 대한 고민이었던 것이다.
(이제는 골든 서클에 대해 이야기해보라고 하면 끝도 없이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동안은 대학 전공을 따라 직업을 선택하거나, 지금까지 했던 일로 다음 일을 모색하는 등 겉핥기 식으로 고민해왔다면 이 프로그램을 통해 처음으로 모든 질문을 내 안으로 향해 던지는 경험을 했다.
그런 것들을 기반으로 앞으로 어떤 선택을 해 나갈지에 대한 고민을 치열하게 해 볼 수 있었다.
사실 퇴사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아서 어찌어찌 찾아간 퇴사 학교였지만, 그곳에서 나는 열심히 일하고 싶은 나를 마주했다.
업무로 야근하는 거였다면 몸서리치게 싫었을 거면서 퇴근 후 아이와 씨름한 뒤에도 매일 새벽 2-3시까지 치열하게 고민하는 나를 보며 내 안의 열정을 발견했다.
그리고 야근이 싫었던 건 내가 워라밸을 중시해서가 아니라 애정이 가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어떻게든 완수하고 싶은 마음에 주말마다 서울행 버스에 몸을 실은 스스로에게서는 성실함과 집요함을 보았다.
스스로를 쭈구리라고 생각하며 괴로운 마음에 퇴사를 꿈꾸고 있었지만 사실은 더 열심히 일하고 싶은 마음을 갖고 있었다.
두 달간의 여정이 모두 끝난 뒤에는 여느 때와 다름없는 출근길이었지만, 내 발걸음은 예전만큼 무겁지는 않았다.
이제는 나를 관찰할 줄 알게 되었고, 내 목소리에 좀 더 귀 기울일 줄 알게 되었고, 이전과 같은 일을 하더라도 그것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한번 따 볼까 하고 공부하던 업무 관련 자격증은 프로그램이 끝날 무렵 바로 접었다.
내가 원해서가 아니라 그게 있어야 어디든 다른 부서로 옮겨가기 쉬울 것 같다는 이유로 따려고 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정말로 필요한 상황이 생기면 그때 가서 다시 공부해도 늦지 않으니 명확한 이유가 없이 혹시 몰라서 라는 이유로 에너지를 낭비하지는 않기로 했다.
아직 나는 완전히 나를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방법을 알았다는 것만으로도 한결 속이 후련해졌다.
개인적으로는 이 수업을 듣는 내내 앞으로 아이들이 커가면서 진로에 관해 이야기를 나눌 때도 꼭 응용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래 희망을 강조하기보다 아이가 스스로 어떤 사람인지를 잘 이해하고 자신이 추구하는 방향성에 맞게 살아갈 수 있게끔 도와줘야겠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장래 희망을 물으면 보통 직업으로 답해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이런 것 자체가 '직업=목표'로 생각하게 만드는 행위라고 한다. 관련 내용은 참고 자료 확인.)
나중에 아이들이 커서 진로에 대한 고민이 들 때 프로그램에서 했던 활동들을 함께 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건 이런 생각을 가지고 아이들을 대하려면 나부터 여기서 배웠던 것들을 잘 체득하고 나다운 삶을 실현해나가야 한다는 것.
좋은 엄마가 되어 주는 것보다 그냥 나답게, 내 삶에 충족감을 느끼면서 사는 어른의 모습을 보여주자고 새롭게 다짐하게 되었다.
※ 참고자료
1. 씽프로젝트 - Core 아이덴티티 디자인 프로그램
: 퇴사학교에서 <아이덴티티 워크숍>을 이끌어주셨던 오르쌤이 자체적으로 회사를 오픈하셔서 이어가고 계신 프로그램. 이전에는 전부 오프라인 수업이었는데 이제는 온라인으로도 참여할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좋다!
2. 아이들에게 장래희망을 묻지 말아야 할 이유 (블로그에 쓴 글)
: 스스로 왜 대학에 가야 하는지를 생각해보기 전에 당연한 듯이 치열한 입시 경쟁에 놓이는 우리나라의 교육 현실에서 아이들에게 장래희망을 묻지 말라는 애덤 그랜트의 기사는 더욱더 와닿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