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건은 아까부터 맘에 들었고, 이제 협상을 시작하지
사춘기 땐 누구나 부모를 약간 부끄럽게 생각한다. 아닌가? 난 그랬다.
나의 경우엔 엄마가 '짠순이' 기질을 드러낼 때마다 약간씩 거리를 뒀다. 가격을 후려칠 때, 좀 더 달라고 당당하게 요구할 때, 눈을 흘기면서 아쉬운 소리를 할 때... '우리 엄마는 깡패인 걸까?' 사춘기 소녀는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한 번은 엄마가 치킨을 쏜다길래 웬일인가 싶었는데, 그동안 아빠가 열심히 쏘아서 마련한 쿠폰 10장을 몰래 내미는 걸 딱 들켰다. 그럼 그렇지.
엄마는 자잘자잘한 돈에 목숨을 걸지만 집안의 큰 지출에는 대범하다. 차를 바꾸고, 집을 옮기고, 있던 벽을 없애서 그 자리에 창고를 만드는 공사 같은 거 말이다. 실은 엄마가 나서야 뭐든 일이 되었다. 비록 엄마의 취향이 아주 세련된 것은 아니지만(예전 집의 빨간색 꽃무늬 포인트 벽지라던가 지나치게 번쩍인다 싶은 황금색 장식장, 강아지 목줄이랑 착각하게 만드는 샌들 등등이 떠오른다) 대신 눈과 손이 매워서 품질만큼은 야무지게 잘 골라낸다. 그것보다 더 매운 협상 실력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는 등 뒤에 숨어 약간의 창피함을 참아내는 것으로 평생 엄마 덕을 보며 산 것이다.
혼수 준비에도 엄마가 나섰다. 약간의 문제는 나도 엄마도 결혼이라는 큰 행사를 앞두고 예민함이 명치까지 차오른 상태라 의견 일치를 보지 못하면 자칫 큰소리가 날 것이고, 여기에 질린 백룡이가 도망칠 수도 있다는 점. 하지만 언젠가 그도 모든 걸 알게 되겠지! 떠날 테면 떠나라는 심정으로 엄마를 차 뒷좌석에 모시고 파주 가구 단지로 향했다.
역시. 엄마는 어느 것 하나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완벽한 포커페이스를 유지했다. 사장님 말이 못 미덥다 싶으면 휙 돌아서서 가구의 어떤 부분을 통통통 주먹으로 두들기며 의심했는데, 뭣도 모르는 내가 들어도 시원찮은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원래 안 보여주는 물건, 원래 안 들어오는 나무, 원래 안 주는 가격... 엄마가 스치는 곳마다 뭔가가 나오기 시작했지만 엄마는 그저 새초롬할 뿐이었다. 뻘쭘해진 나와 남편은 "색이 정말 특이하긴 하네요"라며 애써 사장님 편을 들었지만 쩐주가 싫다는데 무슨 소용 있으랴. 혼수 손님이 왔다고 신바람이 불던 가구 단지에 찬바람이 쌩 불었다.
그렇게 몇 군데를 돌다가 엄마와 나와 백룡이가 합의를 본 가구점으로 다시 찾아갔다. 들어가면서도 엄마는 눈빛으로 "좋은 티 내지 마!"라고 따끔한 주의를 줬다. 금방이라도 휙 돌아설 것 같은 엄마를 상담 테이블로 앉히며 사장님은 얼른 커피를 내왔다. 덩달아 우리도 한 잔씩 받아먹었지만 일개 조무래기일 뿐. 지금 이 순간, 누가 뭐래도 이 구역에서 대부는 엄마였다. 너무 멋졌다.
첫 번째 견적이 나왔고 엄마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다. 오히려 이걸 왜 나를 보여주냐는 느낌이었다. 커피 호로록. 사장님은 곧바로 "여기서~ 세트 할인이 들어가면~" 하면서 서둘러 2차 견적을 냈다. 몇 차례 가격 조정이 들어갔지만 엄마는 에휴, 짧게 한숨만 내뱉었다. 그 한숨이 뭐랄까, 너무 실망스럽다는 느낌이라 내가 다 얼어붙었다. 사장님은 "사모님이 원하시는 금액을 그냥 말씀해 주세요"라고 가슴을 터놓았다.
지금부터 엄마의 변론이다. 사투리 그대로 옮긴다.
"사. 장. 님. 제가 오늘 가구만 몇 군데를 봤는지 모릅니더. 그래도 사장님이 좋아 보이서 제가 여기서 살 마음을 '반쯤' 먹고 왔거든예? 사장님도 저한테 파셔야 남기는 거고, 저도 부산에서 애들 가구 사줄라고 올라왔고예! (중략) 돈이 문제가 아이고 이거는 기분 문제거든요. 나도 마 사장님이 인연이라 생각하고 다시 왔으니까는 우짜든가 최선으로 가격을 주 보이소. 서로 간에 기분 좋게 가입시다. 내가 오늘 가구는 싹 끝내고 갈라고 현찰도 다 뽑아왔으예. 사장님 알아 들으셨지예?"
연신 땀을 닦던 사장님은 잠시만 시간을 달라며 사라졌다가 비장하게 마지막 견적을 만들어오셨다. 이제 됐다, 싶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사장님, 이왕 거실장까지 했으니까 테이블 이거는 그냥 주세요. 나무색도 같고, 따로 팔 물건도 아인데."
깡패 등장. 나는 이 '한 번 더' 쪼으는 지점에서 고개를 떨군다. 그러나 웬걸? 사장님이 이걸 받네? 결론적으로 우린 매장의 오랜 재고였던 멋들어진 책장까지 서비스받아 파주 가구 단지를 떠날 수 있었다.
훗날 엄마는 사촌 동생의 혼수까지 그 집에서 해결하는 것으로 그 은혜를 갚았고, 사장님은 우리가 이사할 때에도 직접 오셔서 가구를 성의껏 조립해 주셨다.
그 후로도 많은 사장님들을 만났다. 이불집 사장님은 노련해서 엄마는 좀 다른 방법을 썼다. 웃으면서 협박하고, 부탁하면서 통보하는 식으로 훅 들어가자 사장님 역시 호소하고, 삐치고, 가끔은 정색도 하며
막아냈다. 한 치의 양보도 없는 멋진 승부였다. 그 후 엄마가 새로운 손님을 데리고 그 매장에 다시 갔을 때 멀리서부터 엄마를 알아본 사장님은 이렇게 맞이했다. "아~ 저 사모님 또 왔네!" 엄마도 응수했다. "사장님은 하나도 안 친절한데 내가 여기서 사주잖아요!" 그날 역시 두 사람은 즐겁게 치고받았다. (시합 결과는 글 마지막에 공개.)
직접 살림을 살다 보니 창피했던 엄마의 모습도 이제는 파워 당당하게 보인다. 나 또한 네고왕 2세로서, 어깨너머로 배운 방법을 하나둘 실천해 보는 중이다. 사장님, 좀 깎아주시면 안 돼요?...... 아, 안되면 말고요. 대부분은 본전도 못 찾고 물러나기 일쑤이지만 내 꿈은 네고왕이다. 엄마라는 훌륭한 스승을 두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