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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델몬키 Apr 11. 2023

운동하는 부부

본격 운동 찬양글


누구에게나 발작 버튼이 있다. 나에게는 남편의 '운동만물설'이 그것이다.


-여보, 나 피곤해.

-운동을 하면 돼.


-여보, 나 잠이 안 오네?

-운동을 하면 돼.


-여보, 요즘 영 기분이 안 좋아.

-운동을 하면 돼.

-너나 해!!!@#)*$)ㅗ^*@!*)%9ㅇ허^(@&

아내의 고민을 기승전'운동'으로 응수하는 남편을 보고 있자면 죽도록 운동을 해서 한 대 펑 치고 싶은 마음이 든다. 하지만 죽도록 운동을 하느니 이대로 살다 죽는 게 여러모로 더 편할 것 같다. 하긴. 새벽 1시에 아령을 들고 푸시업을 하는 남편을 보면서 "잠도 안 자고 저러면 더 빨리 죽을 텐데"라며 나는 나대로 혀를 찼다. 근육이 빠질 새라 필사적으로 닭가슴살을 집어삼키는 꼴도 보기 싫었다.


전형적인 마른 비만인 나는 운동이란 건 해본 역사가 없다. 그저 가끔 살을 빼기 위해 다이어트를, 아니지 그냥 극단적으로 안 먹고 안 마셔서 잠시잠깐 배를 홀쭉하게 만들어 봤을 뿐이다. 원체 술을 좋아하는 나에게 '배'란 원래 늘 불룩하고 물컹한 부위였다. 앙상한 팔다리만 보고 제발 뭘 좀 먹으라고 권하던 사람들도 내가 뱃살을 출렁 꺼내 보이며 "술 좋아하면 뭐...ㅎㅎ"라며 문워크로 달아났다. 평소엔 그럭저럭 넘어갔지만 여름 시즌이 오면 문제는 자명해졌다. 다들 벗기 바쁠 때 나는 허리를 굽혀 꽁꽁 싸매기 바빴고, 늘 무언가를 걸치고 끌어안고 있어야 겨우 사람들과 눈을 맞출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현실이 약간 창피할 뿐 그걸 바꿀 생각은 못해본 것 같다.


그렇게 인생과 복부에 차곡차곡 불만이 쌓여가던 어느 날, 나는 현생의 모든 불행이 복부 비만에서 오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나는 여러 가지로 현타가 왔는데 그것이 쌓이고 쌓여 마침내 인생을 저주하는 단계에 접어든 것이다. 게으르고 한심한 나의 모습이 뱃살로 둔갑해 "나는 너의 과거이자 현재이고 미래일 것"이라며 주장하고 있었다. 이 놈을 당장 제압하지 못하면 난 평생 자기 관리에 실패한 인간으로 살겠지? 적당히 눈 가리고 아웅하는 삶을 살다가 진짜 눈을 감는 순간 "아아... 납작한 배는 꼭 갖고 싶었는데..."라며 후회할 건가? 세상사 내 맘대로 안되어도 내 몸뚱이만큼은 어떻게 해볼 수 있지 않아?

그래, 그러려면...


운동을 하면 돼.


발작 버튼이 동작 버튼으로 바뀌어 내 앞에 놓였다.

신이시여, 저는 이제 헬린이의 길을 걷겠습니다.

나는 겸허히 버튼을 눌렀다.

[스포] 운동에 미친자의 모습이다. 친구집에 1박으로 놀러갔는데 일단 운동복으로 갔고, 취한 상태로 자전거 타고 있음.


마흔 가까운 나이에 처음 맛보는 운동의 즐거움은 뒤늦게 배운 도둑질처럼 신났다. 비싼 PT일지라도 돈 쓸 맛이 났다. 오히려 더 혹독하게 관리와 감시를 당하고 싶었다. 나는 어디서건 무엇이건 간에 제일 잘 해내어 칭찬받고 싶어 하는 미친 모범생 관종이므로. PT 시간이 아니어도 샵에 갔고 선생님 앞을 기웃대며 열심히 지방을 태웠다.


특히 나처럼 생각이 남아도는 인간은 응당 몸을 쓰고 에너지를 몽땅 발산하고 녹초가 되어 잠들어야 만사가 평온해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숟가락 들 힘도 없이 몸을 조져(?) 놓아도 다음날이면 더 팔팔해졌고, 온몸이 두드려 맞은 것처럼 아파도 뿌듯함에 사로잡혔다. 무엇보다 '그래도 난 나를 사랑해'라는 처연한 중얼거림이 아니라 두 눈으로 보이는 확연한 몸의 변화가 정말 좋았다. 잡생각을 몰아낸 자리에 자신감이 살살 차오르자 티셔츠 기장도 덩달아 짧아졌다. 나에게도 허리가 있다니!!! 허리둘레가 줄어든 만큼 운동복 원단도 점차 줄어들어 궁극엔 등이고 옆구리고 훤히 드러나 가끔 원시인 느낌도 살짝 났다.



내가 운동에 돈을 쓰고 재미를 붙이자 남편도 덩달아 집 근처 크로스핏 센터를 끊었다(옛날 같으면 왜 혼자 운동을 가냐고, 난 뭘 하냐고 따졌을 일이다). 그때부터 우린 중년의 등산복처럼, 어디든 운동복을 입고 다녔다. 집에서도 이쪽방 저쪽방에서 각자 아령을 들고 용을 쓰고, 무게가 모자라면 쓰던 아령을 몰래 뺏어오기도 하고, 유튜브로 올바른 자세를 찾아보고, 거울 속 자신의 모습에 간단히 취하기도 하면서... 아무튼 온 집안이 헬창의 기운으로 들썩였다. 늘 "부어라 마셔라"를 외치던 불금 저녁엔, 각자의 센터에서 운동 스케줄을 소화하고 땀에 흠뻑 젖은 상태로 만나 "아이고~ 죽겠다~" 앓는 소리를 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넘쳐나는 기운에 마냥 웃고 있었다. 난 그때 찍은 우리 사진이 참 좋다. 밝고, 건강하고, 희망차 보인다.


운동복으로 버틴 22년.

아아, 좋았는데. 그랬는데. 펫로스를 겪으면서 루틴이 완벽하게 틀어졌다. 한번 헬창의 바퀴에서 내려오니 기운차게 돌아가는 그 바퀴에 다시 올라탈 틈이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요즘 대체로 기운이 없고, 슬쩍 비관적인 생각도 들고, 하는 것 없이 피로하다. 미라클 모닝으로 천지개벽해보려 했으나, 운동이 빠진 미라클 모닝은 윤활유 없이 달리는 고속 열차와 같이 과부하를 일으켰다. 특히 피곤한데도 잠이 오지 않는다. 목에서 피맛이 나도록 몸을 쓰고 침대에 그대로 곯아떨어지던 단순한 시절이 있었는데...


나는 안다. 이제 운동을 해야 한다. 머리만 써서 될 일이 아니고, 몸도 좀 써야 한다는 걸. 생각의 짐을 신체가 나누어 지어야 한다는 것 또한. 발작 버튼 대신 동작 버튼을 누르자. 우울감보다는 근육통을 맞이하자. 그래서 여기에 공표한다.


나 이현아는 내일부터(오늘 안됨), 당장 몸을 쓰겠습니다. 


얼마 전 목수학교를 졸업한 우리 남편은 넘쳐나는 시간 중 2시간 정도를 헬스장에서 보내고 있는데, 어깨가 넓어져서인지 백수 주제에 더욱 기세등등해 보인다. 이토록 운동의 힘은 대단한 것이다.

요즘 벌크업 중인 남편의 모습




글을 마무리하려는데 갑자기 생각났다. 곧 환갑을 앞둔 우리 어머님이 "요즘 엄마가 여기저기 많이 아프다"라고 했을 때 백룡이가 했던 말이. 소시오패스 같은 얼굴로 "엄마, 운동을 해"라고 했다. 그때 어머님도 마음속 깊은 곳 무엇인가가 눌려진 것 같았다. "엄마는 무릎이 아파서 운동을 못해!!!"

나는 어머님 편이다.



코로나로 재택 근무 중이라 아침~점심, 저녁 2번씩 운동을 갔다.


하다보니 점점 바지가 헐렁해졌고,
좀 많이 먹었다, 싶은 날엔 야밤에 공원을 뛰었다.
점점 근육을 붙이는 데에도 재미를 붙이고.
신생아 이후 처음으로 허리 선과 복근을 얻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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