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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델몬키 Apr 11. 2023

사랑의 유통기한

나의 사랑에 유통기한이 있다면 만 년으로 하고 싶다.

잠깐만요! 이글을 보러 들어오신 분들께

어제부터 이틀간 이 글의 조회수가 6,000이 넘어가고 있습니다.

99.9% 외부유입으로 들어오시는데 어째 느낌이 싸합니다?

과연, 어디에서 욕을 먹고 있는 걸까요 ㅎㅎㅎ...

혹시 독극물을 이용한 살인미수죄로 저를 고소하시려는 건 아니겠지요... (그알 애청자이지만 출연하긴 싫습니다.)


이글은 식습관이 아닌, '버리지 못하는' 습관에 대한 에피소드입니다.

실제 저희 집은 매일 저녁, 너무 잘 해먹거든요.

아래 글 거의 초반에 저녁 메뉴를 눈팅하실 수 있답니다.

https://brunch.co.kr/@goodlife371/1


아무튼 혹시 어디에서 보시고 들어오셨는지 살포시 알려주신다면 그분께는 감사의 의미로...

뭘 드리고 싶은데 이제 유통기한부터 보시겠죠?ㅎㅎㅎㅎ

세상에나. 제 무덤을 제가 팠나봅니다.

그냥 이런 인간도 있군, 하고 재미있게 봐주세요!

어떻게든 이곳까지 와주셨다니 감사합니다.





나는 철저한 계획형으로 가능한 모든 상황에 대비하며 사는 편이다. 모든 상황이라 함은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식량 부족, 진돗개 하나 발령, 좀비의 출현으로 인한 국가적 비상사태도 포함한다. 때문에 찬장과 냉장고엔 우리 가족이 1년 정도는 파먹고 살 수 있는 각종 식량으로 그득 들어차 있다. 지구 종말 상황에 살아남은 영화 속 주인공이 성큼성큼 들어와 남아있는 식량을 있는 대로 쓸어가는 그 집, 그곳이 바로 우리집이다.


물론 변명이다. 사실 나는 무엇 하나 쉬이 버리지 못한다. 이것이 가족력, 정확히는 엄마에게서 물려받았음을 처음 깨달은 것은 중 3 때였다. 우리집에 놀러 온 친구들이 냉동실에서 유통기한이 2년 지난 m&m 초콜릿을 발견했고 나는 태연하게 입에 털어 넣었을 뿐이다.


내 기억이 맞다면 우리 엄마의 화장대는 30년째 꽉 차있다. 아빠가 출장길에 사 오셨던 각종 화장품, 향수들이 완전히 새 상품인 상태로 느긋하게 발효되고 있다. 모양도 철자도 다른 향수병을 열면 각종 꽃다발들이 뭉근하고 들큰하게 익어 결국은 비슷비슷한 냄새가 난다. 바로 얼마 전까지도 '나드랑'이라 적힌, 초등학생이었던 내가 어른 흉내를 낼 때 찍어 바른 아이섀도가 여즉 있는 걸 보고 감동했다. 먹는 거라고 크게 다를쏘냐. 엄마의 컬렉션은 냉장고 한 대로도 모자라 김치냉장고, 냉동고, 팬트리까지 대동되었다. 그 혼란 속에서도 엄마는 무엇이든 잘도 찾아낸다. 고기 덩어리 뒤에, 아니 그건 고춧가루고, 까놓은 바지락 살 밑에 옆에 있는, 아니 그건 떡이고... 좋은 마음으로 엄마를 도우려 냉장고 문을 열었던 우리 아빠는 한참을 뒤적이다가 결국 화를 낸다.



엄마한테서 온 인증샷


그 엄마에 그 딸. 결혼을 하고 신접살림을 차린 나도 엄마의 길을 간다. 세일 기간에 득템한 마스카라를 서랍에 던져놓으려고 봤더니 새 마스카라가 2개나 있었다. 그 옆으로 한 때 잡지 지면을 화려하게 수놓은 안티에이징 화장품들이 하염없이 늙어가고 있고. 냉동실은... 차마 열기가 겁난다. 엄마가 싸주신 말린 생선, 부산 오뎅, 곰국, 건어물로도 모자라 촬영을 하고 남은 냉동식품들이 봉인된 채 오랜 추위를 견디고 있다. 입구를 뜯어놓은 김말이와 만두만 해도 5봉지가 넘는다. 촬영용 샘플로 받은 라면들도 인스턴트의 한계를 뛰어넘어 전설이 되어가는 중이다.


이것들은 버리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다. 나는 정말, 진심으로 먹을  있다고 믿는다.'유통기한은 숫자일 '이라는 관대한 태도 때문에 나는  멋대로 소비기한을  개월,  년씩이나 늘린다. 때때로 오늘밤 고비를 넘기기 들겠다 싶은 것들은 몰래몰래 식탁에 올렸다. 요리  살짝 간을 봤을  분명히 괜찮았기에 백룡이도 모를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 뭔가 시큼한데?"라고 뱉어내는 일들이 많아지면서 결국 꼬리를 밟혔다. 보다 못한 남편이 손을 쓰려할 때마다 "그건 안돼!!! 아직 먹을  있다고!!!"라며 약간의 유예 기간을 가질  있었다. 이런 방식으로 용케 살아남은 나의 든든한 지원군들.... 걔네는 갑작스러운 냉장고의 고장과 함께  채로 종말을 맞았다. 가여운 것들.  눈을 질끈 감았던 그날, 찬장에서 안락한 노후를 대비하던 각종 식자재들도 내손으로 보내줬다. 차라리 후련했다.


비포 앤 에프터


아직은 청산하지 못한 잔재들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온다.



그 후로 새 냉장고는 형편없이 텅 비었지만 나는 다시 다람쥐의 정신으로 온갖 것들을 끌어모으는 중이다. '먹어도 안 죽는다'는 그간의 경험도 한몫하지만 나는 언젠가 나의 존버 정신이 빛을 발하리라 믿는다. 애석하게도 우리 남편은 아내의 발효 음식에 늘 의문을 품고, 입에 넣기 전 일단 의심하고 보는 습관이 생겨 버렸다.


하지만 나만 도라이일까? 아니다. 그 아내에 그 남편이랬다. 우리 남편의 애착 수건, 빨면 빨수록 어째 더 쉰내가 나고 뻣뻣함에 몸서리가 처지는 그 수건들 역시 우리집에 존재한다. 나는 몇 번이고 갖다 버리겠다고 협박했지만, 남편은 내 것과 본인의 것을 분리하는 방식으로 수건을 지켜냈고 아낌없이 베이킹소다를 들이붓고 정성을 다해 차곡차곡 개킨다. 그렇게라도 지키고픈 마음을 조금은 이해한다.




흰색이 내 수건. 나머지 모두 남편 거다.



오늘 아침 스파게티 면을 꺼내려고 찬장을 열었다가 밀가루 봉투에 적힌 유통기한을 보고 살짝 양심이 찔렸다. 조금 전엔 남편이 쓰는 거실 화장실에서 손을 닦았는데 잊고 살았던 수건 냄새가 코를 찔렀다. 이토록 서로가 만만치 않기에 옳고 그름은 하늘에 맡겼다. 멀쩡한 냉장고가 생명을 다해 하루아침에 내 모든 걸 잃었듯, 남편도 어쩔 수 없이 헤헤 웃으며 수건을 포기하는 날도 올 거다. 심판의 날까지 우리는 최선을 다해 무엇인가를 끌어모으고, 썩히고, 약간은 즐기기도 하며, 속이고 속아주는 채로 살아갈 것이다. 각자가 가진 병적인 집착을 인정하며 '그래, 그런 너라면 나도 안 버리겠지'라는 믿음으로. "나의 사랑에 유통기한이 있다면 만 년으로 하고 싶다"라는 왕가위 감독의 대사가 유독 사무치는 날이다.




2019년 혼자 이탈리아 여행을 갔을 때 집에 있던 남편에게서 온 카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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