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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성국 Dec 16. 2021

타인의 주관적 경험

나는 16년 7개월을 넘게 여행했고, 이것이 바로 그 여행에 관한 진실한 기록임을 점잖은 독자께 알린다. 나는 화려한 글이 아니라 진실을 보여 주는 글을 쓰고자 무척 신경 썼다. 나는 괴상하고 있을 수 없는 이야기로 독자를 놀라게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가장 간결한 방식과 문체로 명백한 사실을 전하기로 했다. 내 주된 의도는 독자를 놀라게 하는 것이 아니라,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조너선 스위프트, 《걸리버 여행기》 中


    인간의 마음에 대해서는 21세기에 이르러서도 많은 부분이 여전히 미지의 영역이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 사람의 마음은 거짓을 진실인 것처럼 포장하기가 쉽다. 우리는 타인의 주관적 경험을 결코 경험할 수 없다.


    서영신(가명)씨는 음식에 대한 욕심이 적은 편이다. 누군가 음식을 권할 때마다 상대방의 마음이 상하지 않게 거절하느라 애먹는다. 어느 날 케이크를 먹으라고 누군가 권했을 때, 그는 고맙지만 마음만 받겠다 말하고 먹지 않았다. 잠시 후 다른 누군가 케이크 먹었냐고 물었을 때, 그는 먹었다고 했다. 먹지 않았다고 답하면 먹으라 권할 테니.


    그는 부담스러운 인간관계도 되도록 피하려 한다. 예를 들면 누군가 고민 상담을 요청하는 경우이다. 누군가 그에게 고민이 많으면 연락해도 되냐고 물었다. 그는 그러라고 했지만, 거짓이었다. 일부러 거짓임이 티 나게 말했다. 연락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게 진심이었다. 고민 상담을 요청하는 건 그에 대한 믿음을 전제로 한다. 믿음을 보이는 상대의 요청에 단칼에 싫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렇다고 티 안 나게 거짓말을 하자니 진심으로 듣고 고민 상담 연락을 하게 되는 건 싫었다. 그래서 진심을 진심으로 말하지 않고, 거짓을 거짓임이 티 나게 말했다.


   거짓말이란 걸 알아달라며 거짓임이 티 나게 거짓말을 했더니, 다른 누군가가 그를 간파했다는 듯 날카로운 지성인인 양 젠체하며 말했다. “거짓말을 잘 못 하시네요.” 인간의 말과 행동을 보고 내면을 판단하려 시도하는 건 이렇듯 맹랑하다.




    칭찬은 고래를 춤추게 하는가? 타인의 내면을 파악할 수 있다는 사고방식은 이런 흔한 격언에서도 엿보인다. 어떤 행동을 했을 때 잘한다는 얘기를 들으면, 계속 잘하고 싶고 그렇게 말해준 사람의 기대를 저버리고 싶지 않게 된다. 인정 욕구는 인간의 가장 본질적인 욕구 중 하나이기 때문에, 칭찬을 받으면 칭찬받은 행동을 하는 데 더 몰입할 수도 있다. 이런 사례는 많다. 그런데 칭찬이 언제나 고래를 춤추게만 할까?


    나는 어린 시절에 칭찬을 싫어했다. 거의 예닐곱 살 무렵이었다. 어른들이 칭찬을 해주시면 나는 아이였음에도 본능적으로 그 칭찬이 나의 행동을 진정으로 높이 평가한 게 아니라 그저 아이를 예뻐하는 마음의 표현일 뿐이거나 혹은 칭찬을 통해 특정 행동을 강화하려는 시도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칭찬을 받는 것이 싫었고, 칭찬을 받았던 행동은 다시 하지 않으려 했다. 초등학교에 입학하지도 않은 아이에 대해서 조차 칭찬은 고래를 춤추게 하지 않았다.


    누군가 칭찬을 해준 것이 칭찬은 고래를 춤추게 한다는 격언 때문이라고 여기게 되면 칭찬은 더는 고래를 춤추지 하지 못한다. 이것이 인간을 이해하는 게 그토록 복잡한 이유 중 하나인 것 같다. 인간에 대한 일반화는 그 일반화에 의해 무너진다. 인간은 자신이 예측당하는 걸 본능적으로 피하려 한다. 누군가 자신에 대해서 파악했다는 듯이 얘기하면 불쾌감을 느낀다. 자신에 대한 예측에 대해 미리 알고 있으면, 예측에 반하는 행동을 하도록 동기부여된다. 칭찬이 모두에게 획일적으로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단정 짓는 것은 그 단정에 의해 실패한다.


    사람은 단순하지 않다. 누군가 쉽게 타인을 판단하는 말을 할 때마다 그런 생각이 든다. 사람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서영신 씨는 정녕 거짓말을 못 하는 성격인가. 누군가를 칭찬하면 그 사람의 내면은 춤추고 있을 것이라 여겨도 되는 걸까. 우리는 타인의 내면에 대해서 너무 쉽게 재단하는 것 같다. 몇 안 되는 사례를 경험하고는 인간에 대한 일반화를 쉽게 한다. 타인이 어떻게 느끼고 있을지는 그 사람이 되어보지 않으면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그런데 우리는 타인의 주관적 경험을 경험할 수 없음에도 마치 그 사람이 되어본 것 마냥 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고 느끼고 있을지를 쉽게 단정한다.




    그렇다고 사람을 판단하는 말을 아예 하지 말아야 한다는 건 아니다. 삶을 살아갈수록 타인의 말에 내가 불쾌함을 느꼈던 경험과 나의 말에 타인이 불쾌함을 느꼈다는 경험이 쌓인다. 그렇게 할 수 없는 말의 목록이 늘어가다 보면, 점점 말을 잃게 된다. 우리는 대화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서 할 수 있는 말의 경계를 결정한다. 유대감과 신뢰가 쌓인 상대와의 대화에서는 할 수 있는 말의 범위가 넓을 것이다. 나를 신뢰하는 상대에게는 내 생각 중 일부만 짧게 말할 수도 있다. 상대를 단편적으로 판단한 게 아님을 상대가 안다는 걸 내가 알기 때문이다.


    할 수 있는 말의 바람직한 경계가 있을 수 있을까? 이를 판단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다만 많은 사람들이 할 수 있는 말의 경계를 너무 넓게 잡고 있는 것 같다. 상처를 주고 모욕하는 말들이 범람하고 있다. 상대에게 고통을 가하며 쾌락을 느끼는 사디즘 성향의 인간이 과반인 듯하다. 특히 얼굴도 모르고 이름도 모르는 대상에게 말하는 온라인 상에서 이 문제가 얼마나 극심한지는 굳이 강조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말하고 있는 상대에 대해서 잘 모르겠으면 침묵할 것을 제안한다. ‘때론 침묵이 황금보다 소중하다’는 말은 알아두면 좋은 말이다.


    니체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에서 “확신은 거짓말보다 더 위험한 진리의 적이다.”라고 했다. 타인의 내면을 파악했다고 스스로 믿는 사람은 다른 사람과 타협할 여지가 없다. 오로지 자신이 믿는 답을 타인에게 관철시키는 것 말고는 다른 가능성을 고려하지 못한다.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답을 타인도 옳다고 여기게 강제하려 한다. 타인도 나와 같은 믿음을 갖게 강제하는 시도는 반발심만 일으킬 뿐 성공하기 어렵다. 성공할 것이라 믿고 강제하려던 시도는 전체주의가 되었고 그로 인해 사람들이 고통받았다.




    걸리버는 정말로 소인국과 거인국에 다녀왔을까? 걸리버 여행기는 마지막 장의 거의 전체를 그 이야기가 진실임을 맹세하는 데 할애한다. 걸리버 여행기가 진실한 기록임을 천명함으로써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건 무엇이었을까? 그는 힌트를 남겼다. “잔인한 운명의 여신이 이 시논을 비참하게 하더라도 저를 거짓되고 기만하는 자로 만들 수 없을 것입니다.” 트로이의 목마를 트로이 성안에 들였던 그리스 병사 시논의 말이다. 인간은 때로 타인을 속이기 위해 운명의 여신까지 들먹이며 거짓을 진실인 양 말한다. 그 말과 행동이 교묘해서 어떨 땐 스스로까지 속일 때도 있다. 타인의 내면을 파악할 수 있다고 여기는 사람은 걸리버 여행기가 진실이라고 믿는 사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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