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임성국 Dec 23. 2021

쉬운 방법과 옳은 방법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쁜 일을 할 때는, 그 일로 엄청난 물질적 이득을 얻는다거나, 그 일에 대해 강한 확신이 있어서가 아니다. 다만 그것이 가장 쉬운 일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경우가 많다.
 - 장하준, 『나쁜 사마리아인들』, 부키


    우리는 현상을 파악할 때 본능적으로 쉬운 방법에 기대고 있다. 문명의 발전과 별개로 인간은 여전히 유전자의 명령에 종속되어 있다. 설령 그 명령이 현대 문명에서 유효하지 않더라도 그렇다. 감각을 통해 입력된 정보를 숙고하여 처리하는 인간 개체는 수렵 · 채집 생활에서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사냥하다가 주변의 덤불이 바스락거리는 상황을 생각해보자. 일단 무작정 도망치는 개체와 여러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숙고하는 개체 중 무작정 도망치는 개체가 후대에 유전자를 남길 확률이 높았을 것이다. 덤불이 그저 바람에 흔들렸거나 위협적이지 않은 토끼 같은 동물이 지나가던 상황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중 단 한 번이라도 그 바스락거림이 천적에 의한 것이었다면, 도망치지 않고 심사숙고하는 개체는 유전자를 후대에 전할 수 없다.


    깊게 생각하지 않고 본능적으로 위험을 회피하는 행동을 하게 하는 유전자를 가진 사람이 후손을 많이 남겼다. 숙고 없이 일단 도망쳐서 생존하여 번식한 개체들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우리는 본능적으로 쉬운 방법을 택한다. 현대의 생활환경은 과거에 비해 짧은 시간 동안 급격히 변화했다. 따라서 즉각적이고 본능적인 판단이 현대에도 목숨을 부지하기에 적절한 의사결정 수단인지는 따져볼 일이다. 문명사회에서 본능에만 충실하여 행동하는 인간 개체는 그 유전자를 후대에 전하기 어려울 것이다.


    유전자의 힘은 강력하다. 수억 년에 걸쳐 자기 복제에 성공했던 거르고 걸러진 유전 형질이 우리에게 전해졌다. 뇌는 정보처리기관이다. 감각기관을 통해 입력된 정보를 처리과정을 거쳐 말이나 행동이나 생각으로 출력한다. 이는 일종의 알고리즘이다. 생존과 번식에 유리한 말, 행동, 생각을 출력하는 알고리즘이다. 수억 년에 걸쳐 계산된 아주 효율적인 알고리즘이다. 이 과정의 대부분은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일어난다.


    유전자는 수억 년에 걸쳐 변해왔지만, 인간이 수렵 · 채집 생활에서 스마트폰 문명까지 발전하는 데는 2만 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인간의 유전자는 지난 2만 년 동안 거의 변하지 않았다. 2만 년 전에 평원에서 매머드를 사냥하던 호모 사피엔스 개체를 현대에 데려다 면도를 하고 옷을 입혀놓으면 우리는 외국인을 보는 정도의 낯섦을 느낄 것이다.


    뇌는 출력한 말과 행동이 초래하는 결과를 입력 받고 알고리즘을 수정한다. 그것이 획득형질이다. 그런데 불과 2만 년 사이에 비해 환경이 너무 급격히 변했다. 변화된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우리는 80년 남짓한 짧은 삶 동안 수억 년에 걸쳐 계산된 유전형질 알고리즘의 많은 부분을 뜯어 고쳐야 한다. 그것은 본성을 거스르기에 더디고, 에너지 소모가 많고, 어려운 일이다.


    인간 문명은 획득형질로 발전해왔다. 유전형질만 보면 인간은 침팬지를 이길 수 없다. 지금까지 축적된 지식 없이, 즉 조상으로부터 전해받은 모든 저장된 정보 없이 존재하는 인간 무리와 침팬지 무리를 자연 상태에 둔다면 인간은 침팬지를 이길 수 없다. 뉴턴의 말대로 우리는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설 수 있었기에 다른 종보다 우위에 설 수 있었다. 본능적이고 즉각적으로 쉬운 방법에 기대는 성향은 유전형질이다. 쉬운 방법에 기대는 성향을 극복하는 것이 획득형질로써 인간의 우위를 지키는 방법일 것이다.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도는 것은 기쁜 일도 슬픈 일도 아니다. 아무 의미 없이 법칙에 따라 그냥 도는 것뿐이다. 지구상에서 물체가 1초에 4.9미터 자유낙하 하는 것은 행복한 일일까? 4.9라는 숫자는 어떤 가치를 가질까? 4.9가 아니라 5.9였으면 더 정의로웠을까? 진화의 산물로 인간이 나타난 것에는 어떤 목적이 있을까? 공룡이 멸종한 것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진화에 목적이나 의미는 없다. 의미나 가치는 인간이 만든 상상의 산물이다. 우주에 인간이 생각하는 그런 의미는 없다.
그렇지만 인간은 의미 없는 우주에 의미를 부여하고 사는 존재다. 비록 그 의미라는 것이 상상의 산물에 불과할지라도 그렇게 사는 게 인간이다. 행복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행복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게 인간이다. 인간은 자신이 만든 상상의 체계 속에서 자신이 만든 행복이라는 상상을 누리며 의미 없는 우주를 행복하게 산다. 그래서 우주보다 인간이 경이롭다.
 - 김상욱, 『떨림과 울림』, 동아시아


    종교가 탄생한 이유 중 하나는 인간이 정답을 원하기 때문이다. 과거에 인간은 자연현상이 일어나는 원인을 이해하지 못했다. 인간은 자연현상을 설명하는 단순한 원리가 필요했다. 그래서 모든 현상에 대해 알고 있고 모든 현상을 통제할 수 있는 하나의 개념을 창조했다. 대개 그 개념은 신이라 불렸다. 이제는 모든 자연현상의 원인을 신이 화가 났다거나, 신이 자비를 베푸는 것이라 설명하면 되었다. 번개가 치는 이유는 신이 우리를 벌하는 것이다. 이런 설명은 아주 간결하고 이해하기 쉽지만, 옳은 설명은 아니다.


    유전자가 수정되지 않는 한 종교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종교를 초인적 질서에 대한 믿음을 기반으로 하는 인간의 규범과 가치 체계라고 정의한다면, 자살하지 않은 모든 인간은 종교인이다. 종교 없인 삶을 유지하기가 어렵다. 인간의 삶은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고 해서 종교를 믿지 않는 것은 아니다.


    어떤 생명체도 유전자의 자기 복제라는 자연법칙을 거스를 수는 없다. 진화론이라는 획득형질을 근거로 번식만이 삶의 목적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번식을 위해서 사는 삶조차, 유전자의 자기 복제라는 자연법칙에 인간적인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유전자라는 물질이 복제되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것은 소금이 물에 녹는 것과 같이 자연법칙에 따른 화학작용일 뿐이다. 삶에서 겪는 설명할 수 없는 고통을 설명하기 위해 모든 인간은 현상을 쉽게 설명하기 위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 본인은 의식하지 못하고 있더라도 그렇다. 자기 생각의 근원을 파고들다 보면 누구나 결국에 도달하는 곳은 믿음이다. 신은 죽었지만, 신앙은 죽지 않는다.




    독서가 지식 습득의 수단으로써 차지하는 점유율은 점점 낮아지고 있다. 대중은 자세하게 적혀있는 지식보다는 짧게 요약된 지식을 선호한다. 따라서 유튜브가 지식 습득의 수단으로 각광받는 세태는 수긍할 만하다. 나도 유튜브를 많이 본다. 그러나 쉽게 얻은 지식은 잘 작동하지 않기가 쉽다. 지식을 쉽게 얻는 걸 선호할 수는 있다. 다만 그렇게 얻은 지식을 진리라 여기며 살아가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그런 태도는 지양해야 한다. 쉽게 진리를 단정하는 사고방식이 수렵 · 채집 생활에서는 생존에 유리할 수 있다. 그러나 현대의 문명사회에서 그런 방식이 바람직한 방식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많은 사람이 어떤 주제에 대한 하나의 개연적 가능성을 쉽게 필연적 정답으로 여긴다. 모든 일반화는 특수한 조건 하에서 성립한다. 쉽게 얻은 지식은 구체적 현상의 이면에 놓인 조건을 보지 못한다.


    사람 목숨을 가볍게 여기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살인하면 안 된다. 이 말은 어떤 조건을 붙이든 어떤 상황에서든 지켜야 하는 지고지상의 절대 진리인 것처럼 느껴진다. 쉽고 명쾌하다. 그런데 과연 그렇기만 할까? 전쟁 중 군인이 적국의 군인을 사살했다고 그 군인을 살인죄로 처벌하진 않을 것이다. 오히려 훈장을 줘야 한다는 주장이 대개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진다. 살인하지 말라는 명제조차 편적으로 통용되는 건 아니다.


    자유가 소중한 가치라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이 동의한다. 누군가에게 자유는 목숨보다 소중하다. 자유를 위해 목숨을 내놓은 사례는 많다. 자유는 어떤 상황에서도 훼손될 수 없는 소중한 가치라고 할 수 있을까? 각자가 옳다고 믿는 삶의 방식을 존중해야 한다고 해도, 사람을 죽이거나 강간을 하여 쾌락을 얻는 것을 삶의 가치로 여기는 삶의 방식을 자유 보장이라는 이유로 긍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모든 명제는 조건이 달라지면 옳고 그름이 달라질 수 있다는 걸 인지해야 한다. 진리인 명제와 그렇지 않은 명제만 있다고 믿는 방식을 이분법이라 부르고 그렇게 믿는 사람을 극단주의자라고 부른다. 그리고 인간은 본능적으로 쉬운 방법을 택하기 때문에, 끊임없이 자신의 믿음을 의심하고 범주를 달리해보고 조건을 따져보는 훈련을 하지 않으면, 극단과 이분법을 지향한다. 지식을 쉽게 얻으면 편하다. 그러나 편한 것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쉬움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에너지를 적게 쏟는 것이다. 둘째는 가능성이 큰 것이다. 에너지 소모가 적은 쉬운 방법은 목적을 달성하기 어려운 방법이고 에너지 소모가 많은 어려운 방법은 목적을 달성하기 쉬운 방법이다. 에너지 소모가 적은 방법을 본능에 따라 즉각적으로 택하는 걸 지양하고 목적을 달성하기 쉬운 방법을 택해야 할 것이다.


    사람들은 정답을 원한다. 예외를 허용하지 않는,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정답이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피상적인 정보들만 가지고 즉각 직관에 따라 정답이 무엇인지를 파악한다. 인간의 본능이 그렇다. 이런 방식이 과거에는 목숨 부지에 유리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쉬운 방법인 이분법을 택하게 된다. 단편적인 지식만을 가지고 즉각적으로 본능에 따라 판단한다. 이분법은 진실을 파악하기에 옳은 방법이 아니다. 진실은 극단이 아닌 중간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 타인의 주관적 경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