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은 진리라는 인식이 보편적인 것 같다. 수학은 진리인가? 수학적으로 참인 명제들도 그것이 참인 근거가 있을 것이다. 그 근거가 참이 아니라면, 애초의 명제도 참이 아니다. 그러므로 참인 명제의 근거도 참임을 증명해야 할 것이다. 이런 식으로 수학적으로 참인 명제의 근거를 파고들다 보면, 결국 도달하는 것은 증명 없이 참이라고 믿는 명제들이다. 이를 공리라 한다. 진리인 것처럼 느껴지는 수학마저도 그 근원은 믿음이다.
절대 진리는 없다. 모든 학문은 근원을 파고들면 결국 도달하는 곳은 믿음이다. 이 근원에 대한 학문이 철학이다. 어떤 학문 분야든 근거를 파고들다 보면 도달하는 곳이 철학이다. 우리는 뭔가가 옳다고 믿을 뿐, 절대적으로 옳은 것은 없다. 아직까지는 그렇다.
수제 돈가스, 수제 맥주, 수제 구두, 수제 지갑, 수제 초밥. 수제라는 단어가 붙으면 그럴싸하게 느껴진다. 공장에서 양산한 게 아니라 손으로 직접 생산한 걸 수제라고 하는가 보다. 그런데 수제는 어디서부터 손으로 만들어야 수제일까? 냉동 돈가스를 사다가 손으로 튀겼다고 해서 수제 돈가스라고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고기와 빵가루를 직접 사서, 고기에 빵가루를 묻혀서 튀기면 수제인가? 아마 이런 과정을 거치고 나면 수제 돈가스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 같다. 그러나 여전히 고기와 빵가루는 사 왔기 때문에 수제가 아닐 수도 있다.
가축을 직접 길러 고기를 생산하고 밀을 직접 재배하여 빵가루를 만들어야만 수제라고 불릴 수 있는가? 까다로운 성격을 가진 사람은 그렇다고 여길 것이고 털털한 성격을 가진 사람은 직접 튀기기만 해도 수제가 아닌가 할 것이다. 무엇이 수제인가에 대한 대체로 동의할 만한 정의가 있는 듯 하지만, 모두가 동의하는 정의는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어떤 주장에 대한 증명도 비슷하다. 주장을 증명하기 위해 근거를 제시하면, 다시 그 근거가 참이냐 거짓이냐가 문제가 된다. 그 근거의 근거를 제시하면, 그 근거의 근거가 참이냐 거짓이냐가 문제가 된다. 근거의 근거를 향해 갈수록 구체에서 추상으로 간다. 추상으로 갈수록 포괄적이어서 증명 없이 참인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온다. 수학에선 그 끝에 공리와 무정의어가 있다. 증명 없이 참이라 믿는 명제가 공리이고, 정의 없이 존재한다 믿는 개념이 무정의어다.
예를 들면, “포함하는 원소가 완전히 같은 두 집합은 서로 동일하다.”, “임의의 두 집합에 대하여, 그 둘 모두를 원소로 포함하는 집합이 존재한다.”와 같은 명제들이 공리다. 만약 누군가 이 공리들을 참이라고 믿지 않는다면(이는 믿음일 뿐이기에 누구라도 그럴 수 있다), 수학적으로 참인 명제들은 그에겐 참이 아니다. 수학이란 공리와 무정의어로부터 참인 명제들을 쌓아 올린 것이다.
현실에서는 가치가 근거의 역할을 한다. 이는 목적으로 이해해도 좋다. 화자와 청자가 공유하는 가치, 공통의 목적이 무엇인가가 주장의 근거가 된다. ‘이수(가명)는 기본소득을 도입하면 안 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기본소득을 주기 위해서는 세금을 많이 걷어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수가 전제하는 목적은 세금을 적게 걷는 것이다. 그런데 영신(가명)이는 세금을 많이 걷는 게 옳다고 믿는다. 그렇다면 이수의 주장은 영신에게 설득력이 없을 것이다.
세금을 얼마나 걷느냐는 여전히 현실적인 문제이다. 그다음은 어떨까? 이수는 세금을 적게 걷는 게 옳음을 주장한다. ‘세금을 적게 걷어야 한다. 왜냐하면 돈을 번 사람 마음대로 쓸 자유를 침해하기 때문이다.’ 영신이는 자유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가치는 평등이라고 믿는다. 영신은 평등보다 자유가 중요하다는 이수의 믿음을 공유하지 않기 때문에 이수의 주장에 설득력을 느끼기 어려울 것이다.
리처드 파인만의 “왜 자석은 서로 밀어내는가?”에 대한 답변
근거의 근거를 파고들다 보면 궁극의 가치, 궁극의 목적에 도달할 것이다. 그것이 수학 논리에서 공리와 무정의어에 대응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현실적 문제의 근거를 파고들다 보면 도달하는 대표적인 도착지가 자유, 평등, 진리, 행복, 민주주의 등이다.
누군가는 자유보다 평등이 더 중요하다고 믿고 누군가는 자유가 평등보다 더 중요하다고 믿는데, 이는 관찰할 수 있어서 과학적 탐구가 가능한 개념들의 비교가 아니라 논리적 정합성만을 따질 수 있는 추상적 개념들의 비교이다. 자유나 평등을 관찰하거나 만져볼 수는 없다. 따라서 추상으로 갈수록 데이터보단 믿음에 더 의존한다. 만약 같은 믿음을 공유하고 있다면 어떤 주장의 근거가 설득력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근본적인 믿음이 다른 사람의 주장이라면, 설득당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주장의 근거의 근원을 참이라고 믿지 않기 때문이다.
삶의 근본적인 가치관이 다른 (앞의 예를 따르면, 자유가 더 중요한가 평등이 더 중요한가에 대한 믿음이 다른) 이들 간의 토론은 무신론자에게 전도를 시도하는 크리스천의 시도와 같다. 서로 간의 믿음의 차이를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토론은 유의미하지만, 상대를 개종하기 위해 토론을 한다는 접근은 성공하기 어렵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은 잘 변하지 않는다. 말과 행동의 근거가 되는 근본적인 믿음은 잘 변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보통 개념들의 논리 체계는 현실과 무관하다고 여겨진다. 가치관은 가치 간의 위계에 대한 개인의 믿음이다. 철학은 언뜻 추상적이고 뜬구름 잡은 얘기처럼 들리고 현실과는 무관한 얘기처럼 들린다. 그러나 현실에서 모든 말과 행동, 사회 제도와 정책, 법과 규범에서의 근거가 되는 게 철학이다.
수학적 명제의 증명을 하다 보면 어디까지 증명해야 하는 가가 문제가 된다. 근거를 제시하려면 근거의 근거의 근거의 …… 근거가 참임도 증명해야 한다. 이렇게 가다 결국 공리와 무정의어까지 제시해야 한다. 그러나 매번 그렇게 할 수는 없기에 적당한 정도에서 증명을 종료해야 한다. 이는 우리가 참인 전제들을 어디까지 공유하고 있는지에 대한 믿음에 따른다. 제시한 근거를 상대가 참이라고 여기지 않을 것 같다고 믿는다면 근거의 근거를 제시해야 한다. 근거의 근거를 상대가 참이라고 여길 것 같다면 증명을 종료해도 좋을 것이다. 공유하는 참인 믿음이 끝까지 나타나지 않는다면, 행동이나 말을 할 때 상대와 충돌이 발생하는 이유가 근본적으로 다른 믿음을 가진 사람이어서라는 걸 확인한 것이다.
내 글의 설명이 너무 과도하다거나 너무 부족하다고 여길 수 있다. 주장의 근거를 어디까지 제시할 것인가. 독자와 단어의 정의를 공유하고 참이라고 믿는 명제를 어디까지 공유하는지를 규정해야 한다. 이는 지식이 많고 적음의 문제가 아니라, 사소한 것일지라도 지식의 근원에 대한 믿음이 일치하는가의 문제이다.
마치 어느 단계부터 손으로 만들어야 수제인가에 대한 정의를 공유하는 것과 같다. 물론 낮은 단계에서부터 손으로 만들수록 ‘더’ 수제이긴 할 것이다. 명확한 의사소통을 위해 최대한 전제를 공유하고 개념의 정의를 명확히 하려 한다. 냉동 돈가스를 사다가 손으로 튀기기만 해도 수제 돈가스라고 여기는 사람은 이를 답답하게 여길 수도 있다.
엠마뉴엘 칸트는 저서 《순수이성비판》의 머리말에서 수도원장 테라송을 인용하며 이렇게 말한다.
만일 서적의 크기가 면수(面數)에 의하지 아니하고 그것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시간에 의하여 가늠된다면, 대개의 서적의 경우 그처럼 〈면수가〉 짧지 않았으면 〈이해하는 시간이〉 훨씬 단축되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