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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성국 Oct 27. 2021

합리화 알고리즘

우리는 선택권을 얼마나 누리고 있는가?

그는 논리적으로 사고했고, 논리적 사고로 도출한 결론에 따라 행동했다. 반면 우리 대부분은, 정반대로 행동하는 것 같다. 우리는 충동적으로 결정한 다음, 그 결정을 정당화할 논거의 하부구조를 세운다. 그런 후, 그렇게 만들어진 결과를 상식이라고 말한다.
 - 줄리언 반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다산책방



    합리화는 인간이 겪는 스트레스를 완화하기 때문에 진화했다. 어떤 인간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신념과 가치관에 반하는 정보가 유입됐을 때 신념과 가치관이 무너짐으로써 겪는 고통과 스트레스를 줄이기 위해 신념과 가치관을 수정하는 것이 아니라 유입된 정보를 신념에 부합하도록 수정하는 것이 합리화다.


    우리는 흔히 합리화라는 말을 사용한다.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잘못을 저지를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들면 합리화하지 말라고 한다. 이때 제시되는 이유는 터무니없는 것도 있고 일견 타당한 것도 있다. 합리화하지 말라는 말의 전제는 이 합리화 행위를 자신의 의지로 행한다는 것이다. 합리화가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자동적으로 진행된다면 합리화하지 말라는 말을 아무리 해도 합리화는 진행되므로 이 말이 의미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나는 금연 중이다. 금연도 훈련이 필요하다. 어느 날 갑자기 금연하여 죽을 때까지 안 피우게 되는 식으로 진행되지 않는다. 계속 시도해보며 훈련하면 점점 참을 수 있는 힘이 생긴다. 금연을 시도할 때, 나는 나의 사고방식을 관찰하며 흥미로운 점을 발견했다. 흡연 중에는 담배를 끊어야 할 이유를 100가지도 댈 수 있다. 주변에 금연 슬로건이 흘러넘친다. 담배를 피워도 되는 이유는 찾기가 어려웠다. 담배를 끊고 싶은 마음만 간절할 뿐이다.


    그런데 금연을 시도하고 24시간이 지나는 순간 내 뇌는 태세를 전환한다. 갑자기 담배를 피워도 되는 합리적인 이유가 마구 떠오르는 것이다. 예를 들면, 담배를 피우면 심장병의 위험성이 높아진다는데 담배를 피우지 않으면 스트레스가 증가한다. 스트레스는 심장병을 포함해 거의 모든 질병의 원인이고 수명을 단축시키는 최대 요인이다. 담배를 피워서 스트레스를 줄이는 것이 건강을 위하는 길이라고 생각하는 거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이 논리는 반박된다. 금연 후 시간이 많이 지나면 금연 스트레스는 줄어드는 반면에, 담배는 피우면 피우는 대로 건강에 해롭기 때문이다.


    이러한 합리화가 타당하냐 터무니없냐를 떠나서 나는 궁금해졌다. 내가 떠올린 논리는 내 의지로 떠올린 것일까? 나는 내 의지로 그 논리를 떠올리지 않을 수도 있었을까? 내가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이라 해도, 니코틴의 결핍 상태가 나로 하여금 특정 논리가 떠오르게 하는 데 영향을 미친다면, 나는 선택권을 얼마나 누리고 있는 것인가?




    인간은 직관적으로 ‘나’라는 단일한 정체성을 가정한다. 미래에 의사가 되는 꿈을 꾸는 나, 저녁 식사로 파스타를 먹고 싶어 하는 나, 지난달 제주도를 여행했던 나가 모두 같은 나라고 느낀다. 그러나 이러한 단일한 나라는 느낌은 환상이다. 인간의 정체성은 시간에 흐름에 따라 변한다. 이 사실은 경험적으로 이해가 된다. 어제의 내가 느꼈던 감정, 생각했던 미래에 대한 전망, 장래 희망, 먹고 싶은 음식은 오늘의 내가 느끼고 생각하는 것과 다르다.


    지금이라는 특정한 시간을 놓고만 따지더라도, 인간의 정체성은 단일하다고 할 수 없다. 20세기 초에 간질 환자들의 뇌량을 절제하여 간질 발작을 억제하는 수술이 시행되었다. 인간의 뇌는 좌뇌와 우뇌로 나뉘어 있고, 둘을 연결하는 게 뇌량이다.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한 로저 스페리와 그의 제자 마이클 가자니가는 뇌량이 절단되어 좌뇌와 우뇌가 분리된 환자들을 연구했다. 신체와 뇌를 연결하는 신경은 좌우가 교차되기 때문에, 신체의 왼쪽은 우뇌에 연결되고 오른쪽은 좌뇌에 연결된다. 좌뇌와 우뇌가 분리된 환자들은 마치 몸의 왼쪽과 오른쪽이 다른 사람인 것처럼 행동했다. 오른손이 문을 열려고 문 손잡이를 잡는데, 왼손이 문을 열지 못하게 막는다던가, 왼손으론 신문을 들고 읽으면서, 오른손엔 그림책을 들고 읽기도 하였다.


    그뿐 아니라 뇌량이 끊긴 한 10대 소년에게 장래희망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화가라고 대답했는데, 왼쪽 눈에만 보이게 장래희망이 무엇이냐는 문장을 보여주면, 왼손으로 카레이서라고 적었다. 언어 및 말하기를 담당하는 뇌 부위가 뇌에 있기 때문에 말로는 좌뇌의 장래희망인 화가를 말했지만, 우뇌와 연결되어있는 왼쪽 눈에 문장으로 써서 물어보면, 카레이서가 장래희망이라고 대답했다. 좌뇌와 우뇌는 장래 희망도 다르다.

     

    또 다른 실험에서는 좌뇌(말하기 담당)에 닭의 발톱 사진을 보여주는 동시에 우뇌에 눈 내린 풍경을 보여주었다. 환자에게 무엇을 보았냐고 물어보았더니 ‘닭의 발톱’이라고 대답했다. 그런 다음 환자에게 그림 카드를 주고 방금 본 것과 가장 일치하는 사진을 고르라고 했다. 환자는 오른손(좌뇌)으로 닭을 골랐지만, 왼손(우뇌)으로는 눈삽을 골랐다. 왜 닭과 눈삽을 둘 다 가리켰냐고 묻자 환자는 대답했다. “닭의 발톱과 가장 일치하는 그림은 닭이고, 닭 우리를 치우려면 삽이 필요하잖아요.”


    좌뇌는 눈 오는 풍경에 대한 정보가 없었고 왼손이 눈삽을 고른 이유를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럴듯한 이야기를 지어낸 것이다. 좌뇌에는 삶에서 일어나는 이해할 수 없는 사건들을 납득하기 위해 그럴듯한 이야기를 지어내는 기능이 있다. 이처럼 합리화는 합리화를 담당하는 뇌 부위에서 자동적으로 진행된다. 완전히 불합리한 상황일지라도 이 과정은 무의식적으로 진행되어 말이 안 되는 말을 지어낸다.




    합리화를 담당하는 뇌 영역이 어떻게 발달했을까? 합리화를 담당하는 영역이 생존과 번식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생각해보자. 기존의 믿음과 새로운 정보 사이에 충돌이 생겼는데, 무엇이 진실인지 파악할 수가 없다. 해소하지 못한 불확실성은 스트레스가 된다. 스트레스를 적당히 해소해내지 못한 개체들은 그렇지 않은 개체들에 비해 생존이 불리했을 것이며, 따라서 번식을 통해 유전자를 남기기가 어려웠다.


    인간은 살아가면서 매우 불행한 사건을 적어도 한번 이상 겪는다. 예를 들면, 사랑하는 사람의 사망은 살다 보면 겪을 수밖에 없는 큰 불행 중 하나다. 노환으로 인한 자연사가 아니라, 자연재해나 사고처럼 예측 불가능한 원인에 의한 사망이라그 슬픔은 매우 클 것이다. 자신이 그러한 불행을 겪을 수밖에 없었던 타당한 설명이 주어지 않는다스트레스가 오래 지속될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쉬우면서도 그럴싸한 이유를 지어내기 시작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개념 중 하나가 신이라고 생각한다. 가족이 벼락에 맞아 사망했을 때 그 사망의 원인에 누군가의 의도는 없다. 거기엔 아무런 의미도 없다.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게 그렇다는 것을 가족을 잃고 낙담한 사람이 받아들이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래서 번개에 대한 과학적 설명이 밝혀지지 않았던 과거에는 벼락에 의한 사망을 신이 내린 형벌이라 여겼을 것이다.


    모든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의 원인을 ‘신에 의한 것이다’라고 설명한다면, 불합리를 해소할 수 있는 아주 쉬운 방법이 된다. 불합리한 상황을 쉽게 설명하는 이야기를 잘 지어낸다면, 즉 합리화 알고리즘이 잘 작동하는 뇌를 가지고 있다면 그렇지 않은 개체에 비해 일생에 누적되는 스트레스의 총량이 얼마나 차이 날지 상상해보라. 합리화 잘하는 뇌를 가진 개체가 더 잘 생존하고 더 많이 유전자를 남겼을 것이다. 이런 과정을 무수한 세대에 걸쳐 반복하여 남겨진 유전자를 우리는 갖고 있는 것이다.




    수백만 년에 걸쳐 유전자에 축적된 우리의 합리화 알고리즘은 그 힘이 매우 강력하다. 그래서 신에 대한 믿음이 중세나 근대에 비해 많이 희미해진 현대에도, 여전히 '신앙'은 희미해지지 않았다. 인간은 여전히 불합리한 상황을 쉽게 설명해낼 수 있는 가상의 개념을 놓지 못한다.


    흔히 니체가 신은 죽었다고 했다지만, 그는 신의 그림자는 수천 년간 살아있을 것이라 덧붙였다. 신은 죽었지만 신앙은 죽지 않는다는 뜻이다. 여전히 인간은 경배할 대상을 찾는다.




    합리화가 본능적으로 일어난다는 건 사실이다. 이 사실을 두고 누군가는 합리화를 합리화하는 데에 쓸 수도 있을 것이다. 악행을 저지르고 잘한 일이었다고 합리화를 하며 자신이 합리화를 하는 것은 내가 하려고 하는 게 아니라 자동적으로 발생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할 수 있다. 이런 점에 대해 우려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합리화가 본능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타인의 합리화를 이해하고 타인에 대해 관대해질 수도 있다. 타인을 깎아내리지 않고 스스로 겸손해지고, 자신의 합리화를 객관적으로 관찰함으로써 더 합리적이 될 수도 있다.


    어떻게 영향을 미칠지는 인간 마음의 문제이기 때문에, 과학적으로 검증하기 어렵다. 좋은 영향을 미치든 나쁜 영향을 미치든 사실이 사실이 아니게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사실을 왜곡하거나 그 사실의 전파를 제한하여 타인의 내면을 통제할 수 있다는 믿음이 위험하다. 그러한 통제 가능성에 대한 믿음이 전체주의와 독재주의의 원인 중 하나였다고 나는 판단한다.


    인간의 말과 행동을 통제할 순 있겠지만, 인간의 내면을 통제할 수는 없다. 사실이 제시되고 그 사실을 각자의 가치관에 따라 해석하며 다양한 가치들이 서로 충돌하고 합의하는 과정을 거치는 사회가 더 건강한 사회라 나는 믿는다. 어쩌면 이러한 믿음조차도 나의 유전자 및 삶의 경험의 총체로부터 형성된 내면의 가치관에 의해 결정된 것이다. 우리는 선택권을 얼마나 누리고 있을까.



참고서적

샘 해리스, 『나는 착각일 뿐이다』, 시공사

고병권, 『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그린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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