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는 명확하지만 가해는 불분명하다. 피해자는 피해 사실을 적극적으로 소명하도록 동기부여되지만, 가해자는 가해 사실을 부정하도록 동기부여되기 때문이다. 가해가 원인이고 피해는 결과이므로 피해가 파악되고 나서 가해가 분석된다. 결과는 파악되었으므로 명확하지만, 원인은 결과가 파악된 후 분석하기 시작하므로 결과보다 명확하지 않다. 개념들의 논리적 체계가 아닌, 현실 세계에서 결과란 하나의 원인에 의한 것이 아니다. 인과의 사슬 속에 여러 원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이다.
내가 당구공을 밀어서 당구공이 움직이게 된 단순한 사건 조차, 사고 실험에선 내가 당구공을 민 사건이 당구공이 움직인 유일한 원인이라고 말할 수 있겠으나, 현실에서의 나는 언제나 당구공을 밀게 되기까지의 경위가 있는 것이다.
피해를 당한 입장에서는 가해의 책임을 명확히 하고 싶어 한다. 자신이 겪고 있는 고통의 책임을 명확히 하지 않고선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단순히 가장 가까운 원인에 가중치를 100% 부과하는 쉬운 방법을 택하고자 하는 충동을 거스르기 어려워한다. 즉, 당구공이 움직인 원인은 오로지 내가 당구공을 밀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당구공을 밀게 되기까지의 경위가 있다면 어떨까.
예컨대, 누군가 당구공을 밀지 않으면 나를 때리겠다고 했다면? 당구공을 밀면 밥을 사주겠다고 했다면? 그 경위 또한 당구공이 움직인 원인 중 일부이며, 각각이 원인으로써 차지하는 세부적인 비율은 경위의 내용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게다가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은 대체로 당구공이 움직이는 사건보다 훨씬 복잡하다. 가장 가까운 원인에 가중치를 100% 부과하는 방법은 100%가 아닌 것을 100%로 여기는 잘못을 저지른 것이다.
모든 사람은 어느 정도 피해를 당하며 살아간다. 피해를 당했더라도 자신이 당한 피해가 복잡하게 얽힌 다양한 원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임을 감내할 수 있어야 한다. 특정한 누군가의 책임이어서가 아니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그 불분명함으로 인한 고통도 감내할 수 있어야 한다.
뚜렷하게 악인을 규정하면 편리하다. 하지만 편리한 방법이 옳은 방법인 건 아니다. 그 수와 비율을 헤아리기 어려운 여러 책임 주체가 복합적으로 원인이 되어 어떤 피해가 발생했다는 주장이 더 진실에 가깝다. 따라서 진실의 승인은 고통이다.
이렇게 말하면 누군가는 범죄자를 옹호하는 것이냐 비판할 수 있다. 그러나 범죄자를 옹호하려는 것이 아니다. 만약 어떤 가해에 대해 범죄자가 원인으로써 차지하는 실제 비율이 80%인데, “저 사람이 가해의 원인으로써 차지하는 비율은 80%보다 낮습니다.”라고 한다면 범죄자를 옹호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나의 주장은 80%를 100%로 여기는 비이성을 비판하는 것이지 80%를 70%로 여기자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80%를 70%로 여기는 것도 마찬가지로 비이성적이다.
그리고 어떤 피해의 여러 원인들 중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요소(사람, 법인 등)가 원인으로서 차지하는 실제 비율을 명확히 규정할 수 없다는 사실에서 고통은 비롯된다.
이런 맥락에서 올해 한국 나이로 102세인 철학자 김형석 님의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은 그저 인내 하나 배우러 오는 것 같다’라는 말은 울림이 깊다.
진실을 직시하는 것은 때론 고통스럽다. 고통은 삶을 불행하게 만든다. 진실과 행복 중 진실이 언제나 상위에 있다는 주장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각자가 행복과 진실 중 무엇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지 정립하는 것은 중요하다.
누군가 자신은 행복이 삶의 목적이며, 따라서 행복과 진실 중 하나를 택해야 할 때 행복을 택하겠다 말한다면, 그를 나무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행복과 진실 중 무엇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지 생각하지 않는 채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생각하며 살아가는 사람보단 좋은 삶에서 멀어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