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 못해도 괜찮아.
초등 때는 노는 게 공부다.
제법 길게 자란 아들의 모발을 깔끔히 정리하기 위해 미용실에 다녀왔다. 집 앞에 실력 좋은 미용사가 있다는 건 얼마나 큰 행운인가. 여기저기 시험 삼아 다녀봤지만 결국 여기가 최고라는 결론을 얻고 정착한 지 좀 되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원장님과 부원장님이 반갑게 맞아주신다. 이번에도 아들은 원장님께 너무 짧게 자르지 말아 달라고 당부를 한다. 한 때 앞머리를 계속 기르겠다고 버틴 적이 있다. 아무렇게나 자란 잡초가 걸어 다니는 것 같은 착각을 안겨주었던 화려한 전력이 있기에 이 정도는 뭐...
"오케이, 그래 그래라." 하고 웃는다.
커트를 마치고 나니 얼굴이 훤해졌다. 원장님이 스펀지로 목에 묻은 머리카락을 털어주면서 말씀하셨다.
" 에구, 5학년 되었으니 좋은 시절 다 갔네. 이제 본격적으로 공부해야지?"
아들이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아서 대신 대답했다.
" 울 아들은 6학년 때까지 실컷 놀 거예요. 공부 잘하면 좋지만 못해도 상관없거든요."
이 말에 원장님 표정에 당황스러움이 스쳤다. 뭐 이런 엄마가 다 있냐고 생각하셨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진심이다. 공부가 중요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초등학교 시절에 실컷 노는 게 공부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본인이 원하는 태권도와 방과 후 두 가지만 하고 나머지 시간에는 펑펑 놀았다. 최근에 바둑을 권유했더니 하고 싶다고 해서 바둑이 추가된 정도다.
공부 잘하는 아이가 되기 위해서 정말 누려야 할 것들을 누리지 못하는 아이들의 현실이 매우 안타깝다. 공부 잘해서 인정받고 좋은 대학과 직장에 가는 것이 인생의 전부인 것처럼 쫓기듯 살아가는 삶이 과연 이상적인 삶일까? 의문이 든다. 우리는 언제쯤 이 지겨운 틀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공부 못하면 무시당하기 때문에 자존감이 떨어진다고? 어설픈 대학 나오면 나중에 취업도 못할까 봐 불안하다고? 그래서 내 아이를 위해 공부를 강요할 수밖에 없다고?'
그런데 공부 못하면 무시당하는 분위기를 만드는 것도 결국 부모들 아닐까. 지금껏 그런 문화에 길들여져 살아왔기 때문이겠지만 말이다. 공부는 부족해도 그 아이만의 재능과 매력을 높이 사주는 문화가 자리 잡는다면 부모님들 마음이 한결 가벼워질 텐데. 그렇게만 된다면 공부에 재능이 있거나 공부에 전념해야 하는 분명한 이유가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굳이 성적에 끌려다니지 않아도 된다. 극단적인 경우이긴 하지만 초등학교 저학년 아이가 밤 10시까지 국영수와 사회를 배우러 학원을 전전하지 않아도 된다. 이 얼마나 이상적인가. (어느 이상주의자의 이루어질 수 있는 꿈. 시간이 좀 걸릴지라도...)
우리 집 아들은 책 읽기를 좋아하지만 공부는 거의 안 한다. 그럼에도 이 녀석에게 공부 재능이 있을지 모를 일이다. 맨날 놀던 아이가 어느 날 갑자기 목표의식을 갖고 배움에 집중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으니까. 만약 그런 일이 일어나면 적극적으로 밀어줄 생각이다. 끝내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꼭 성적에 연관된 배움이 아니더라도 아이의 개성과 적성에 맞는 것을 배울 수 있도록 응원해 줄 생각이다. 끊임없이 배우고 성장하는 게 얼마나 보람 있고 즐거운 일인지 깨닫는 것도 매우 중요하니까.
이렇게 글을 쓰다 보니 마음속에 담긴 말들이 밀물처럼 몰려온다. 우리나라의 교육현실에 대해 할 말이 참 많았구나 싶다. 어떤 일이든 다양한 선택지가 있다. 그러니 정답을 말하고 싶은 게 아니다. 다만 이런 생각을 하는 부모도 있으니 다양한 각도로 바라볼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