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결혼한 2003년경에 우리나라의 난임 비율은 10쌍 중에 1쌍 정도였다. 약 17년이 지난 지금은 7쌍 중에 1쌍 정도가 정도가 난임이라고 한다. 그만큼 난임은 심각한 사회문제로 자리 잡았다. 처음엔 그 심각한 문제의 중심에 우리 부부가 서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오히려 천천히 아기를 갖자며 여유를 부리기까지 했었다. 결혼 후 2년 동안 피임을 했다. 하지만 피임을 하지 않아도 아이가 생기지 않자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그 이후 8년 동안 피가 마르는듯한 마음고생을 하고 나서야 우리 부부는 부모의 길에 들어설 수 있었다.
세 번의 인공수정과 네 번의 시험관을 진행하는 동안 반복되는 좌절 속에 참 많이 울었다. 평생 흘릴 눈물을 다 쏟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시험관을 진행할 때는 임신만 되면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임신 이후의 스케줄은 상상을 초월했다. 엄청난 입덧과 조산 위기 등 넘어야 할 산이 많았다. 서른여덟이라는 늦은 나이에 처음 아이를 낳으려니 기형에 대한 불안감도 컸다. 무사히 아이를 낳고 나서는 아이 목욕시키는 일조차 중노동으로 느껴질 만큼 힘들었다. 임신 기간 내내 거의 누워 지내서 체력이 바닥이었던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생긴 것과 달리 비실대던 사람이 잠도 제대로 못자고 모유수유를 하겠다며 두 시간에 한 번씩 깨어 젖을 물렸더니 극적인 피로에 시달렸다. 늦게라도 엄마가 되어서 행복했지만 몸이 따라주지 않으니 막막하고 눈물겨웠다.
아이가 17개월 정도 되었을 때는 피로가 극에 달했다. 대상포진에 걸리기도 하고 고열에 시달리다가 수액을 맞기도 했다. 마흔도 안된 나이에 대상포진이라니... 당황스러웠지만 의사 선생님의 말씀에 의하면 요즘엔 젊은 사람도 많이 걸린다고 했다. 초기에 발견해서 다행히 빠르게 치료가 되긴 했지만 그만큼 체력이 바닥 나 있었나 보다. 무더운 여름인데도 수시로 밖에 나가고 싶어 하는 아이와 함께 밖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 것도 요인이었을 것이다. 엄마가 되어보니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이 왜 위대한지 깊이 와 닿았다. 경험만큼 좋은 선생은 없다고 했던가.
어렵게 얻은 이 아이를 어떻게 키워야 할까?몸이 힘든 와중에도 따라다니는 고민이었다. 아이를 낳기 전부터 육아나 교육에 관심이 많았고 간접 경험도 많았지만 막상 닥쳐보니 혼란스러웠다. 머리로는 아는데 몸이 따라주지 않는 경우도 있었고 너무 원칙적으로 하려다가 오히려 부작용이 나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자꾸 뒤돌아보았다. 내가 잘하고 있는 것일까, 혹시 나도 모르게 아이에게 상처를 주고 있는 건 아닐까?
코로나 19의 영향으로 아직 입학식을 하지는 못했지만 어쨌든 우리 아들은 초등학생이 되었다. 앞으로 갈 길이 더 멀지만 지금껏 키우면서 깨달은 것이 있다. '너무 완벽한 엄마가 되려고 하지 말자. 아이에게 필요한 건 완벽한 엄마가 아니라 자신을 인정해주며 깊이 사랑해주는 존재다.' 이렇게 생각하자 마음도 편해지고 육아도 편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