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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뭔가좋다 Jul 30. 2019

그 남자는 지퍼를 올렸을까?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는 부천역에서 지하철에 올라탔다. 

왜 갑자기 그가 내 눈에 들어온 지는 모르겠으나 지하철에 앉아 멍하니 창 밖을 바라보다 그가 눈에 띄었다. 



머리는 살짝 눈썹을 덮을 정도로 기르고 검은색 반팔티를 입고 목에는 헤지즈 카드지갑을 걸고 있었다. 찢어진 청바지에 밑단은 손가락 한마디만큼 접어 올리고 하얀 리복 운동화를 신고... 잠깐 뭐지?? 아 이제 알았다. 왜 내가 이 남자에게 눈이 갔는지.




 그는 바지 지퍼를 열고 있었다. 다행이라면 티셔츠가 길어 밑단에 지퍼가 걸려 잘 보이지 않는 것이랄까.



 그때부터 내 눈이 나도 모르게 그의 지퍼로 향하길 반복했다. 어떻게 하면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자연스럽게 알려 줄 수 있을까? 감정을 절제하고 무심한 말투로 "지퍼 열렸어요" 귓가에 툭 던져볼까? 아니면 "저기.. 죄송한데 지퍼 열린 것 같아요." 내가 왜 죄송해야 하는지는 모르겠으나 처음 입을 열 때 죄송하다는 말로 시작하는 게 왜인지 마음이 편할 것 같다.



이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내가 누군가의 소중한 부분을 너무 쳐다보고 있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에 시선을 얼른 거두었다.



근데 내 지퍼는 잘 잠겨있나? 나는 잘 정리했나? 실수하지 않았을까? 바지를 입을 때 자세한 기억은 없지만 평소처럼 지퍼까지 잘 정리했을 것이다. 집을 나서기 전에 화장실에 들른 게 생각났다.



마음이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확신이 서지 않았다. 내 무릎에 가방이 올려져 있어 눈으로 확인하려고 가방을 들어 올리는 동작이 너무 크게 느껴진다. 촉감을 이용하기에는 가방 밑으로 손을 집어놓고 꿈지럭 거리는 모습이 누군가의 오해를 불러일으킬 것만 같았다. 지하철에서 내리는 순간을 노려야겠다.





지하철은 이제 구로역을 지나 신도림에 도착하기 전이었다. 나는 여기서 2호선으로 갈아타야 하는데 그도 신도림에 내린다면 꼭 말해줘야겠다. 지하철 문이 스르륵 열림과 동시에 이번 역에서 내리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의지와 함께 내 몸은 자연스레 지하철 문 밖으로 옮겨졌다.



나는 그를 찾았다. 일종의 사명감이 생긴 듯했다. 그가 자신의 실수를 뒤늦게 발견하고 느낄 부끄러움을 덜어줘야겠다. 빠른 시선으로 주변을 훑었다. 그는 신도림 좀비 떼들과 함께 저만치 앞서 가고 있었다. 왼쪽으로 휙. 오른쪽으로 휙. 나는 영화에서 범인을 쫒는 형사처럼 사람들을 지나쳐갔다.

 


그의 뒤에 바짝 붙은 뒤 핸드폰에 문구를 적어 보여줬다.
"지퍼 열리셨네요. 하하"



그는 뭐야 이 사람은? 눈빛에서 당황의 눈빛으로 변했다가 자신의 아래를 확인하고 실수를 수정했다. 그 시간은 정말 찰나였다. 실수를 알려주고 빠르게 자리를 뜨려고 했지만 좀비 떼가 내 길을 막았다. 어색하게 서 있는 나에게 그는 감사의 눈빛과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는 빛의 속도로 사라지려 한 것 같지만 그 역시 좀비 떼에 길이 막혀 멈칫 한 뒤 몸을 돌려 반대로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나도 내 지퍼를 다시 점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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