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작년 말쯤 한 일간지 칼럼에서 글쓴이가 이 책을 매개로 서술한 점이 인상 깊어 구입했던 책이다.
그렇게 책에 대한 기대감이 있던 터라 늘 빨리 읽어봐야지 했는데, 결국 긴 시간이 흘러 최근 며칠 동안에서야 겨우 읽기를 모두 마쳤다.
옮긴이가 쓴 해설에 따르면 중남미 출신 작가의 노벨 문학상 수상 사례는 총 세 차례(1945, 1967, 1982)로 나타나는데, 이 중 나는 이번 소설을 통해 두 차례나 노벨상 수상작을 읽은 셈이 되었다. 1967년 수상작인 이 소설과, 1982년 수상작인 '백년 동안의 고독'(책 이야기 13) 덕분에.
이 작품은 주민들을 상호 감시토록 하고 부하들 역시 이중삼중의 감시와 견제를 하도록 부추겨 모든 정보를 틀어쥔 채 전제군주적 독재를 일삼는 대통령 각하, 대통령의 심복인 미겔 카라 데 앙헬, 대통령 각하의 정적인 에우세비오 카날레스 장군의 딸 카밀라 등 이 세 사람이 중심인물이라고 볼 수 있는데, 거리의 부랑아 펠렐레가 대통령 각하의 절친인 손리엔테 대령을 갑작스럽게 죽이면서 사건은 시작되고 이후 상황도 변화무쌍하게 확장되어 나간다.
한편, 손리엔테의 우발적 죽음을 정적 제거에 활용하라는 지시를 받은 미겔 카라 데 앙헬은 지시를 따르는 과정에서 오히려 정적의 딸 카밀라와 사랑에 빠지면서 소설은 복잡 미묘하게 전개되는데, 이를 통해 순진한, 고결한, 계산 빠른, 권력에 민감한 여러 민초와 승진과 대통령의 관심에 목마른 국방법무감 같은 잔인한 권력자 등 여러 주변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러면서 카라 데 앙헬은 대통령 각하의 뜻을 거스른데 따른 불안과 두려움, 그럼에도 점점 깊어가는 사랑 사이에서 번민과 혼란을 겪는다. 하지만 끝내 사랑을 키워나가면서 이제는 자신들의 살 길을 찾고자 하며, 마침 대통령 각하가 자신에 대한 미국의 부정적 여론을 호전시키도록 카라 데 앙헬을 미국으로 보내려고 하는데, 카라 데 앙헬은 이 기회를 살려 새로운 삶을 위한 반전을 모색한다.
하지만 소설의 끝부분에 이르면, 대통령 각하의 계략으로 미겔 카라 데 앙헬은 22시간의 암흑이 지배하는 지하감옥에서 희망마저 빼앗겨 절망에 잠긴 채 비참하게 죽고, 카밀라는 카라 데 앙헬이 떠나기 전 잉태한 그의 아이를 낳아 시골에서 조용히 살아가게 되면서 소설은 끝을 맺는다.
이 같은 기본적인 내용에 더해, 상호감시의 사회분위기상 오로지 대통령을 찬양해야 하는 민초들의 힘겨운 삶과 권력자의 지시 하나만으로 없는 죄도 갖다 붙여 감금과 고문을 일삼고, 심지어 매음굴에 팔아넘기는 비인간적 상황도 곳곳에 그려져 있는데, 이를 통해 저자가 경험했던 1920년대 과테말라의 독재 시대상이 어떠했는지 이 소설은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았다.
그런데 이번 작품을 읽으면서 들었던 생각은 중남미 소설 특유의 환상적 묘사가 때에 따라서는 조금 힘들기도 하다는 것이다.
앞서 '백년 동안의 고독'에서도 '마술적 리얼리즘'으로 대표되는 그 같은 묘사가 다분했는데, 이번 소설은 그 이상으로 많은 점이 내게 있어서는 독서의 흐름에 장애로 다가왔다. 특히, 후반부로 갈수록 더 그랬는데, 어떤 때는 인내심 테스트 같은 느낌마저 들었달까! 등장인물들의 생각이나 의식의 흐름뿐만 아니라 상황 등 여러 방면으로 초현실주의적 묘사들이 두드러져 책을 읽는 말미에는 조금 지치기도 했다는;;
번역문 특유의 매끄럽지 못한 문장, 특히 수식어구의 수식어구의 수식어구가 이어지는 문장들도 간혹 드러나 여러모로 책의 순간순간을 이해하고 넘어가는데 쉽지 않았던 것 같다.
아직 독서가 많이 부족해 그런 어려움이 있었을 거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한편으론 이제 1900년대에 쓰인 중남미 출신 작가들의 소설은 당분간 자제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도 함께 들었다.
이렇게, 이번 책은 그냥 이 정도로!
2021. 7.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