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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뽈뽈러 Nov 17. 2022

유럽에서의 인연

# 회고, 20년 전 유럽 <3>


마르세유에서 출발한 야간열차 테제베(TGV)는 새벽 5시 무렵 국경도시 스트라스부르에 정차했습니다.


이곳에서부터는 독일 고속열차 이체(ICE)로 환승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갈아타고서 몇 시간 후 저는 드디어 독일 하이델베르크에 당도합니다.




그런데 하이델베르크역 화장실에서 세면과 양치 등 용무를 본 뒤 본격적으로 시내투어를 하려던 찰나, 저 멀리서 낯익은 한국인 남성 한 사람이 눈에 띄었습니다.


누군지 생각해보니 비행기표를 공동 구매하여 함께 온 일행 중 한 명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잠시 고개가 갸웃해졌습니다.


이 사람은 자신의 대학 친구랑 둘이서 여행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그저 혼자 있는 것입니다.


얘기를 나누며 자초지종을 듣다 보니, 이 둘은 여행 초반에 심하게 다투어 결국 각자가 원하는 여행을 하기로 하고 헤어졌다고 합니다.


이때가 파리 도착 후 정확히 1주일째였는데, 그동안 꽤 심각하게 다투긴 했나 봅니다.


그 당시 동성끼리든 이성끼리든, 연인관계든 친구사이든 해외에서 장기간의 여행은 하지 말라는 속설이 있었습니다.


여행 중에 마음이 틀어지고 상해서 결국 헤어진 채 귀국하게 된다는 속설 말입니다.


이 친구들이 영판 그랬습니다.


그것도 여행 초반부터 말입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여행할 때 저는 無계획주의자 입니다.


이것저것 준비하는 과정에서 여행이 자칫 일처럼 느껴질 수 있을까 봐 기본적으로 교통과 숙박 정도만 하루 이틀 전에 알아보고 나머지는 다소 즉흥적으로 순간순간 결정하는 편입니다.


하이델베르크로 온 것도 순전히 학창 시절 배웠던 원시 인류 중 하나인 '하이델베르크 원인(?)'에 대한 기억이 어렴풋하여 마침 야간열차로도 이동이 가능한 점이 겹쳐 이렇게 오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오기를 너무나도 잘했던 게, 유럽의 중소도시에 대한 매력을 처음으로 느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중세풍의 건물, 도시 전체의 아기자기함, 산과 숲과 강이 한데 어우러져 풍기는 고즈넉함, 붐비지 않고 여유와 느림이 함께하는 한적함 등에서, 정말 이런 세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꽤 신선하고 새롭게 다가왔습니다.


도시 규모도 크지 않기에 몇 번이고 돌아보면서 여유를 즐겼던 곳이 바로 하이델베르크였습니다.

하이델베르크 시내와 성 그리고 강. 강 건너편은 철학자의 길이라는 곳으로, 이제 기억이 가물한데 우리가 익히 알 만한 독일의 유명 철학자가 걸었다고 하여 철학자의 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날 저녁 무렵 갑자기 예상치 못한 상황이 전개됩니다.


앞서 언급한 역에서 만난 남성이 한나절 함께 다니는 동안 제가 편했는지 또는 혼자 다니는 것에 대한 부담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저랑 계속 같이 다니고 싶어 하는 눈치였습니다.


하이델베르크에서 다시 다른 지역으로 가야 하는 상황에서 다음 행선지를 함께 고민하는 것이었습니다.


마침 저 역시도 혼자 다니는 것이 조금은 심심하던 차에, 나이도 동갑인 데다 서로 부담 없이 지내다 보니 이 친구랑 함께 다음 행선지인 베를린으로 향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우리는 2주가 넘도록, 전체 36일 중 거의 절반을 동행하게 됩니다.


가히, 우연이 인연이 되는 순간입니다.


비록 낯선 여행지에서 꿈꾸는 이성과의 달콤 러블리한 인연은 아니었지만ㅎㅎㅎ

하이델베르크 엽서. 표지 사진 역시 엽서.



2022. 11.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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