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오늘도 저는 시를 씁니다.
우리는 종종 시를 ‘짧고 압축된 문장 속에
감정을 담아낸 글’이라고 쉽게 정의하곤 합니다.
하지만 시는 단지 짧다는 이유로 시가 아니며,
아름다운 단어들이 모였다고 해서 시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시라는 장르는 우리가 가진 언어 감각과 정서,
그리고 사유의 깊이를 가장 예민하게 시험하는 문학이라 합니다.
그래서일까요.
시를 쓰는 저 역시, 가끔은 이런 생각에 머뭇거리게 됩니다.
‘내가 쓰는 이 글이 정말 시일까?’
‘나는 잘 쓰고 있는 걸까?’
어쩔 땐 너무 부끄럽기도 하고,
괜히 소심해지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마음을 열어 짧은 몇 줄에 제 감정을 담아봅니다.
글과 글 사이, 공백과 공백 사이,
말을 잇지 못하는 감정들을 이어주는 "...." 또한 저에게는 시입니다.
그 속에는 수많은 이야기와 감정들이 고요히 깃들어 있습니다.
읽는 사람에 따라 그 감정선은 달라지고,
각자의 경험에 따라 슬픔, 외로움, 아픔,
그리고 희로애락이 다르게 읽히기도 합니다.
그 다름이 저는 참 좋습니다.
시를 문학적으로, 언어적으로 설명하라면
아직도 어떻게 말해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늘 고민하고, 생각하며, 스스로에게 묻곤 합니다.
‘시란, 무엇일까...?’
오늘은 그런 시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짧지만 깊은, 말보다 더 많은 것을 담고 있는 그 세계에 대해.
그리고 그 세계를 향해 조심스럽게 마음을 열어보는
저의 이야기 말입니다.
시의 종류를 나누자면 누구나 아는 방식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운문시, 산문시, 자유시, 서정시, 서사시, 극시 등으로 나눌 수 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시가 독자에게 어떤 정서적 호흡을 요구하느냐입니다.
서정시는 내면의 풍경을 조용히 끌어안으며 말을 아끼는 대신 감각과 이미지를 통해 호소합니다.
서사시는 사건과 내러티브로 흘러가며, 시 안에서 일종의 ‘이야기 흐름’을 구축합니다.
극시는 갈등과 목소리, 행간에 담긴 움직임으로 독자의 눈앞에서 장면을 만들어냅니다.
그런데 요즘은 이런 장르적 경계가 거의 사라지고 있다고 합니다.
서정시 안에 서사가 들어오고, 서사시 안에 시적 자아가 서성입니다.
장르의 이름보다도
‘어떤 언어의 결을 취하고 있느냐’가 더 중요한 시대가 된 것 같습니다.
시에는 요구되는 것이 있다고 합니다.
단순히 운율이나 문장 구성의 문제가 아니라,
‘절제된 감각의 밀도’를 담아내는 것이 그 핵심입니다.
시는 많지 않은 말로 많은 것을 말해야 합니다.
길지 않은 시간 안에 독자의 감각을 열고, 멈춰 서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시는 정보가 아니라 ‘정지된 감정의 순간’을 포착하는 글쓰기입니다.
★시가 독자에게 요구하는 것★
낭독할 수 있는 리듬, 다시 읽고 싶은 잔상, 그리고 끝나지 않은 감정의 여운.
시는 이해되기보다 감각되어야 하며, 설명되기보다 느껴져야 합니다.
좋은 시는 문장이 끝났는데 생각은 계속 머뭅니다.
그 한 문장이 어떤 독자에게는 하루를, 어떤 이에게는 인생을 바꾸기도 합니다.
그게 시가 가진 유일무이한 힘입니다.
현대의 시는 분명히 바뀌고 있습니다.
이제 시는 예쁘거나 운율이 아름다운 것이 아니어도 됩니다.
오히려 날카롭고 건조하고 파편적이기까지 한 시가 더 많이 쓰이고, 읽힌다고 합니다.
왜일까요? 그 이유는 단순합니다.
현대인의 삶이 더 이상 유려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감정은 짧고, 생각은 복잡하고, 관계는 불확실하며, 시간은 쫓기듯 흘러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대의 시는 일상을 해체하고 재조립하는 언어의 실험실이 되고 있습니다.
문법을 지키지 않아도, 시어가 고상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언어가 지금의 나에게 솔직하냐는 것,
그리고 그 불완전함을 나누고 싶으냐는 것입니다.
시를 쓰는 행위는 더 이상 ‘완성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불완전한 감정의 조각들을 용기 있게 꺼내 놓는 일입니다.
현대인들이 선호하는 시는 뭘까?
요즘 독자들은 어떤 시를 좋아할까요?
단정하고 미문으로 가득 찬 시보다는, 나의 삶과 닿아 있는 시,
마음속 문장처럼 따라 하고 싶은 시를 좋아합니다.
예전의 시가 ‘시는 이렇게 써야 한다’는 규범에 가까웠다면,
지금의 시는 ‘이런 감정도 시가 될 수 있어요’라는 열린 문에 가깝다고 합니다.
가령, 짧은 SNS용 시처럼 2~3줄로 된 시,
에세이의 문장을 시적으로 바꾼 산문시,
혹은 일기처럼 쓰인 감성시가 인기를 끌고 있는 것도
현대 독자의 감각은 복잡한 구조보다 ‘즉시 공감’에 가까워졌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멋진 시’보다는 ‘내 얘기 같아서 읽는 시’가 사랑받습니다.
읽는 순간 마음이 멈추는, 그 한 문장을 찾게 됩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저에게도 시는 마냥 쉽지만은 않습니다.
그것은 시를 읽는 사람이 아니라, 쓰는 사람이 되었을 때 더욱 그렇습니다.
그래서 가끔은 시가 저에게도 낯선 언어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땐 부끄러움이 밀려와, 며칠씩 시를 읽지도, 쓰지도 않게 되곤 합니다.
반면, 어떤 날은 모든 것이 시처럼 보이고 순간마다 시가 떠오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런 날이 늘 찾아오는 것은 아니기에,
아무리 애써도 한 줄의 시조차 쓰지 못하는 날도 많습니다.
무엇보다 내가 평가받는 대상이 된다는 사실,
그 부담감은 시를 쓰는 본래의 이유를 흐리게 만들고,
그로 인해 마음이 슬퍼질 때가 있습니다.
삶이 시라서 시를 쓴다고 말하는 내가 스스로의 시를 부끄럽게 여긴다면,
그것이 삶이 부끄러워서인지, 아니면 시인으로서의 문장력이 부족해서인지
가끔은 그 경계를 분간하기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면, 시인으로서 시를 마주할 자격이 있는지를
조심스럽게 스스로에게 되묻습니다.
그 순간, 제 안의 또 다른 목소리가 이렇게 속삭입니다.
시는 평가의 대상이 아니라고,
시는 삶의 순간들을 고요히 붙잡아두는 일이라고요.
그 말은 참 따뜻하게 다가옵니다.
시는 그렇게, 자신에게 건네는 다정한 말처럼
그 안에 따뜻함을 담고 있습니다.
어느 날,
한 줄의 시를 제대로 읽는다는 것은
그날의 나를 조금 더 진지하게 마주하는 일이 되고,
그로 인해 삶을 더 깊이 들여다보게 됩니다.
그때부터 시는 더 이상 어려운 시험 문제 같은 언어가 아니라,
내 삶을 비추는 조용한 거울이 되어줍니다.
결국, 내 안에 말로 붙잡히지 않는 감정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시를 쓰는 것이 아니라, 살다 남은 마음의 조각들을
시라는 그릇에 살며시 담아두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시는 짧지만, 그 여운은 오래 머뭅니다.
그 짧은 문장 속에서 우리는 다시 살아갈 용기를 얻기도 합니다.
그래서 오늘도 저는 시를 씁니다.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그저 오늘 하루, 내일 하루,
그렇게 하루하루를 온 마음으로 살아가듯
저의 시도 누군가의 마음에 따스하게 닿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바람을 담아, 오늘도 조용히 스스로의 감정을 꺼내어
한 줄의 시로, 나를 마주하는 글을 써보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