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양병원에 입원해 있는 필자의 어머니는 그곳 생활이 6년째 접어든다. 전후의 척박한 환경과 가난한 시절 남편 뒷바라지와 자녀들 양육까지 도맡으며 맞벌이 생활에 지칠 만도 하지만 어머니는 강인했다. 삶의 의지는 강했지만 세찬 파도처럼 닥쳐오는 고난을 돌파하는 방법으로 점집을 찾기도 했고, 새벽마다 정안수를 떠놓고 빌기도 했다. 그래도 어머니의 방법은 무식한 방법일지라도 정면 돌파였다.
곗돈을 부으며 속히 차례가 돌아오길 바랐고, 웃돌 빼서 아랫돌 괴듯 친지에게 돈을 빌려 생활의 부족분을 메꾸어 나갔다. 작은 단칸방에서, 조금 넓은 월세 방으로, 거기서 조금 더 넓은 전셋집서, 또 다시 더 넓은 전셋집으로, 드디어 마침내 장만한 작은 연립주택에서 행복해하던 어머니. 회사에서 정년 지나 은퇴했으나 그래도 일하면서 돈 버는 재미에 미련을 못 버려 마트의 청소 일을 자원했다.
처음에는 일의 요령을 몰라 락스를 거의 한통 모두 뿌려 어지러운 증세에 쓰러진 적도 있었다. 어머니는 화장실에서 주운 지갑이나 귀중품을 많이 찾아줘 선행 상을 받기도 했다. 그렇게 쉼 없이 일하다 자녀들의 만류로 시간적 여유가 생기자 옛 지인의 전도를 받고 교회에 안착한 어머니는 매일 새벽제단을 쌓았다. 여러 종교를 섭렵했기에 기도 실력이 좋았던 어머니는 자녀들의 안녕과 축복을 불철주야로 기원했다.
어머니의 헌신에 장성한 자녀들은 돌아가며 맛난 음식점에 어머니를 모시며 즐거운 시간을 마련하며 공양했다. 또 크고 작은 선물들과 문안전화로 어머니를 위로했다. 그런 시간이 10여년 주어졌는데 그게 아마 어머니의 생애에서 가장 찬연했던 황금시절이었지 싶다. 남편과의 알콩달콩 좋은 시절도 있었겠지만 전후의 경제 사정은 소시민이 생활한다기보다 생존의 문제에 가까웠을 것이다.
주렁주렁 달리는 고구마 줄기처럼 자녀들의 순산은 비길 데 없는 생명의 환희였고 축복이었지만 척박한 양육환경은 불에 덴 듯 파고드는 아픔이었으리라. 어머니에게 있어 젊을 때 남편과 울산을 찾은 것은 행운이었다. 한창 경제개발 붐이 일어나던 울산은 공업단지가 조성돼 건강만 따라주고 부지런하다면 어려워도 식솔들을 건사해 나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만약 어머니가 매일 일기를 썼다면 파란만장한 드라마요 희비가 교차하는 그 내용은 소설책 서너 권 분량도 넉넉히 채웠으리라. 어머니의 일기장에 갈음하는 다양한 흑백사진과 각양각색의 컬러사진들은 수많은 앨범들 속에서 그것을 증명하고도 남는다. 어머니는 노년에 앨범 속의 사진들을 수십 년 이사해도 안방에 걸려 있던, 가보 같은 거울에 빈틈없이 빼곡하게 붙여 놓았더랬다.
처음에는 앨범을 뒤적이기 귀찮아서 그랬는가 생각했는데 나중에 유추해보니 그것이 치매 초기증세의 발현이었다. 가장 나중까지 같이 하고픈 가족의 존재는 거울의 빈틈 하나 용납 않고 빼곡하게 채워져야 했다. 자신의 얼굴은 못 보아도 그리운 가족들은 바라볼 때마다 항시 시선에 포착돼야했다. 그것이 어머니만의 자녀들을 향한 그리움의 표현방식이었다.
코로나 19로 인해 필자가 어머니를 못 본지 꽤 시간이 흘렀다. 바쁘다는 핑계로 평소에 자주 찾아가지 못해도 다음 방문에는 훌훌 떨칠 수 있었다. 30분 걸리는 가까운 곳이라서 불침번처럼 돌아가며 울산의 가족들은 어머니를 잘 챙기고 있었다. 하지만 언제 그런 날이 다시 올지 하수상한 세월이라 걱정이다. ‘지자체나 병원에서 환자들과 영상통화라도 할 수 있게 해주면 좋으련만...’ 궁리궁리하는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