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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정관 편집장 Oct 31. 2020

지성호 북한인권포럼 대표 강연


네가 살아난 것은 기적이다. 그 기적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북한사람들의 고통의 대변자돼 한국에 알리고, 세계에 알려라!



 부활절 특집 신문지면을 구성하느라 취재하랴 기사 쓰랴 광고 받으랴 분주할 때 지성호 북한인권포럼 대표의 강연소식을 접했다. 바야흐로 북핵으로 인해 한반도의 안보정세가 폭풍전야와 같은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인바 南北美中日이 각자의 주판알을 튕길 때 백악관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탈북자들을 초청해 만났다. 지성호 대표는 유엔 초청연설에서 목발을 번쩍 들어 올리며 탈북한 자신의 인간승리를 외쳤고, 트럼프 대통령을 만나는 그 자리에서 북한 주민들이 자유를 누리게 해달라는 세계인들의 관심을 촉구했다. 그 뉴스는 전 세계로 방송돼 국내외적으로 잘 알려졌다. 이 뉴스를 접한 울산극동방송 박민철 지사장은 지성호 대표에게 이메일로 강연 요청을 해 3월 16일 일정이 잡혔다. 지성호 대표는 오후 2시 남구의 근로복지회관에서 강연했고, 저녁에는 대영교회 금요집회에서 신앙간증 집회로 북한의 인권에 대해서 소개했다.


  


지성호는 북조선의 가장 끝자락에 위치한 곳에서 태어났다. 부모와 동생들과 할머니까지 여섯 식구가 살아갈 때 경제적 어려움으로 초근목피를 이어갔다. 배급으로 도저히 살아갈 수 없는 처지였다. 그가 살고 있는 곳은 탄광지역이라 그는 석탄을 실은 열차가 회령까지 20여km를  내달리는 동안 전력으로 달려가 열차에 올라타 갈탄을 땅에 던져야 했다. 또 열차가 달리는 동안 뛰어내려 떨어진 갈탄을 찾아 둘러메고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팔아야 겨우 그것을 옥수수 같은 식량으로 바꿀 수 있었다. 하루는 열차에서 뛰어내리다 정신을 잃어버렸다. 그리고 정신을 차렸을 때 자신이 기차의 철로 위에 놓여진 것을 알았지만 충격으로 움직일 수 없었다. 육신의 뼈가 다 으스러질 것 같은 극도의 충격으로 그는 정신을 잃고 말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그가 정신을 차렸을 때 지옥 같은 고통이 엄습했다. 기차에 왼쪽 다리를 잃고 말았다. 왼쪽 손가락 세 개도 잃게 되었다. 그래도 그는 자신의 육신을 안전한 곳으로 움직일 수 없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구조를 요청해도 못 본 체하고 지나갔다. 그를 돕다가는 자신들도 가족에게 최소한의 식량을 구해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대로 나는 죽는가보다’ 하는 순간 여동생이 지나가다 오빠를 발견하고 혼비백산 놀라며 비명을 지르고 자지러졌다. 병원에 급거히 옮겼지만 진통제도 없었다. 어머니는 아들의 모습을 보고 정신을 잃었다 차렸다 반복했다. 정말 캄캄한 흑암의 시간은 지루했다. 지성호는 예비혈액도 없어 수혈도 못하고 진통제도 없이 의사의 응급처치를 온 몸으로 감내할 수밖에 없었다. 왼쪽 다리를 톱으로 절단하고, 뼈를 갈고 하는 동안 그는 살아있다는 것을 포기하고 싶을 만큼의 통증에 정신을 잃고 말았다. 임시처방으로 수술을 마쳤지만 그가 겨우 버티어낸 7개월의 시간은 지옥흑암 같았다. 겨우 몸을 추스르고 그는 다시 생활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다. 북한주민들의 삶은 생활이 아니라 생존이었다. 하루라도 먹을 것을 구하지 못하면 굶어죽는 수순으로 이어지니 척박한 삶에 생존을 위해 발자취를 옮겨야 됐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다리가 절단된 삶의 현장에 다시 갈탄을 주우러 가야했다. 먹을 것이 없어서 돌아가신 할머니는 채 30kg이 되지 않을 만큼 가벼웠다. 어머니는 중국에 식량을 구하러 갔지만 돌아오지 않았다. 뒤이어 떠난 여동생도 마찬가지였다. 지성호는 중국에 갔다가 우연히 교회에 갔다. 기독교인들은 사람의 탈을 쓴 승냥이로 배웠지만 정말 그런지 호기심이 생겼다. 그곳에서 그는 따스한 환대를 받으며 당분간 지낼 수 있었다. 한 달 정도 지낸 후 그는 북조선 자신의 고국으로 돌아왔지만 국경수비대에 체포돼 무자비한 고문과 구타를 당했다. 그들은 “동무 같은 장애자는 공화국의 수치요 수령님의 얼굴에 먹칠하는 살아있어서는 안 될 존재야!”라는 말에 속으로 아연실색했다. 겨우 내쳐져 쫓겨난 그는 탈북을 결심하고 동생과 두만강을 건넜다. 진눈깨비가 내려 녹자 밤새 불어난 강물은 무서웠고, 감시하는 경비병의 눈을 겨우 피해 구사일생으로 중국 국경에 닿았다. 중국에서 남한사정을 알게 됐다. 북한에서 교육하던 것과는 완전 딴판이었다. 중국과 북한정세도 파악할 수 있었다. 자신의 장애 때문에 동생과 같이 하다가는 둘 다 적발될 것을 염려해 “나는 잡힐지라도 너는 살아야한다. 우리 형제의 인연은 여기까지인가보다”하며 동생과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지성호는 동생에게 기도를 따라하게 했다. “하나님이 보호하시면 대한민국 서울에서 만날 수 있게 하소서!” 지성호는 동생을 먼저 보내고 탈북루트의 긴 여정에 비틀거리며 다시 발을 뗐다. 하루는 열차 안에서 공안들이 신분증 검열을 해서 조마조마 하는 순간을 맞았다. 브로커는 공안들에게 뭐라고 말하자 곧 공안들은 떠났다. 지체장애에 정신질환을 앓고 있으니 검열하면 발작해 소란이 일어난다고 했더니 공안들이 바로 떠났다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 살려주세요” 라는 기도가 저절로 나오는 힘겨운 탈북과정을 거쳐 그는 드디어 남한에 도착했다. “우리 형, 남한에 오게 해달라”고 기도했던 동생과는 남한에서 극적으로 재회했다. 남한에서 그는 부친의 소천에 대해 들었다. 잡혀가 고문 끝에 처형당해 집에 두고 간 시신을 이웃들이 장례를 치렀다고 했다. 지성호 대표는 강연 도중 목소리를 높였다. “북한에 태어난 것이 죄가 아니지 않은가. 장애인이라는 게 죄가 아니지 않은가” 그의 말대로 공산주의 체제가 들어선 북한 체제에서 조부모와 부모에게 태어났다는 것이 죄는 아니지 않은가.


  


그는 남한에 정착해 살면서 포장마차를 했다. 이미 노점상을 하던 사람은 우리가 이미 하고 있는데 당신이 왜 여기서 장사를 하느냐 하면서 몇날 며칠을 시비를 걸어왔다. 그는 “나는 북조선 출신인데 같이 좀 먹고 삽시다”하면서 그곳에서 끈질기게 영업을 했다. 탈북자가 포장마차를 한다고 지역방송에 출연한 것을 계기로 시비를 거는 행동은 멈추어졌다. 나중에 그는 상도덕을 몰랐던 해프닝이라 알게 됐다고 한다. 그러나 그 당시는 생존문제나 다름없었기에 뒤돌아볼 수 없었다. 그는 대학생활을 하면서 컴퓨터를 배우며 바쁘게 지냈다. 어느 날 기도하는 가운데 “그렇게 의식주 문제만 해결하라고 탈북한 게 아니다”는 응답을 받았다. 대학생활 가운데 미국에 초청받아갔다. 그는 여태 자신이 겪은 삶의 리얼한 스토리를 강연하자 청중들은 하나같이 일어나 열화 같은 기립박수로 환대했다. 그는 나치 독일 집권시절 수많은 독일의 크리스천이 나치의 만행에 침묵한 것을 예를 들며 “알리지 않으면 나쁜 사람”이라고 말했다. 한번은 7살짜리 꼬마가 탈북자들을 북송하지 말라는 피켓을 들고 시위하는 것을 목격했다. “꼬마야, 너 엄마가 시켜서 나왔지?”라고 물었을 때 그 꼬마는 “우리 아빠는 대한항공 기장이예요. 제가 TV를 보는데 탈북한 7살짜리 꽃제비가 신발이 없어서 눈물이 났어요. 그래서 제가 이렇게 호소하는 거예요”라고 대답했다. 그때 그는 엄청난 충격을 느꼈다. ‘7살 꼬마가 저런 행동을 하는데 29살 먹은 나는 뭐하는 사람인가?’ 그는 이륙하는 비행기 안에서 LA의 야경을 보면서 눈물로 기도했다. “하나님 제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그가 기도하자 하나님은 ‘겸손한 마음으로 함께하라’는 에베소서 4장 2절의 말씀을 들려줬다.


“하늘에 쌓아둔 보화가 많으니 걱정하지마라”
“수많은 사람들이 있으니 걱정하지마라”



그는 강연료로 받은 20달러를 헌금하고, 친구들과 함께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는 극동방송에 출연해 북한인권상황을 알리고 탈북민들에게 용기주는 메시지를 전했다. 나중에 탈북한 사람 중에서 산속에서 일하면서 지성호 대표가 출연한 극동방송을 들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만났다. 그가 첫 씨앗으로 심었던 20만원이 1년 후 200만원이 돼 12번이나 인신매매됐던 사람을 구했고, 애가 딸린 미성년자도 구했다. 어느 교수가 1000만원을 후원해 5명을 구출했다. 신혼부부는 신혼여행비용을 아껴 지원했다. 하나님은 그가 낯선 외국 땅의 정글에서 했던 기도를 행함으로 연결하고 계셨다. 북한에서 연락이 끊겨 생사를 알 수 없었던 어머니도 남한에서 다시 만났고, 2010년 경 여동생도 다시 만나게 되었다. 3년째는 5000만원을 들여 25명을 구출했다. 그가 “더 많은 사람을 구할 수 있도록 1억을 달라”고 기도했을 때 기말고사를 포기하고 카드를 만들어 팔았던 친구들이 1300만원을 만들었다. 그래서 낙심할 때 방송출연을 계기로 후원이 들어와 그 금액이 채워졌을 때 그는 하나님의 일하심에 온몸에 전기가 통하듯 전율을 느꼈다. 한동대와 이화여대와 숭실대에 이런 활동을 하는 대학생들이 많이 있어서 감사하다고 한다. 지난해는 100명 구출을 목표로 했지만 72명을 구했다. 그는 강연 요청을 받고 6시간 운전해서 달려왔다. 승용차로 온 것은 소식지를 나누기 위해서이다. 「북한인권포럼」은 탈북학생들과 함께 통일 이후를 준비하고 있다. 한반도를 넘어서 땅 끝까지 가는 통일준비를 하고 있다. 북한의 풍부한 지하자원과 저렴한 북한의 노동력 때문에 통일하자는 것이 아니다. 크리스천인 우리들은 신앙 안에서의 일치를 꿈꾸며 통일을 준비해야 한다.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하나님의 마음으로 섬기는 우리들이 되어야 한다. 그날을 위해 함께하는 울산시민과 교회들이 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북한을 떠나 중국에서 떠도는 30만명의 소외된 탈북자들이 있다. 그들을 돕기 위해 나는 “돈 좀 내라”며 선한 강도의 역할을 자처한다. 때로는 대표는 도망가고 싶은 자리이며, 힘들다고 말하려 해도 하소연하기 어려운 자리이다. 이런 내게 남북청년들이 우스갯소리로 “조직이 우습니?”라고 말한다. 탈북청년들이 미국에 가서 북한 꽃제비공연도 했고, 북한을 여행하다 체포돼 의식불명상태로 귀국해 사망했던 미국청년 오토웜비어의 묘지를 찾아가 대신 속죄하는 마음으로 헌화하기도 했다. 백악관 앞 잔디공원에서 영어로 퍼포먼스도 펼쳤다. 그러면서 나는 현실로 이루어진다는 생각은 1퍼센트도 하지 않은 채 ‘백악관에 한 번 들어가 봤으면’하는 마음을 가졌다. 그런데 일전에 나는 트럼프 대통령에게서 여러 탈북자들과 함께 백악관에 초청을 받았다. 일주일에 세 번이나 나는 트럼프 대통령을 만났다. 가장 보잘 것 없는 한 사람의 탈북자요 지체2급 장애인이 내게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난 것이다. 하나님이 내게 존귀를 주신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북한인권 개선촉구와 아울러 바람 앞의 촛불같이 위태로운 탈북자들을 보듬어 안으라는 사명 때문일 것이다. 다리절단 후 7개월간 수술치료과정의 죽음 같은 고통의 경험으로 인해 나는 탈북자들을 연민한다. 그래서 이전에 내가 겪었던 아픔도 감사로 승화되고 있다. 나는 가끔 장애로 인해 보름씩 입원하기도 한다. 북한에서 체포돼 불순분자 취급받고 멸시받던 내가 남한에 도착하자 25일 만에 의족과 의수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남북한의 자유와 인권의 극명한 차이였다. 그가 마지막으로 자신의 하는 일에 동행을 권하는 인사말로 강연을 마무리했다. 그와 뜻을 같이 한다는 것을 알리려는 듯 청중 속에서는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필자가 서두에 언급했듯 남한에서 꽃 한 송이 피는 것을 보기 위해 한 달을 기다려도 누가 뭐랄 사람이 없지만 북한에는 오늘 먹지 않으면 당장 죽는 사람들이 있다. 또 중국을 떠돌며 인권의 사각지대에서 방황하는 30만 명의 난민 같은 사람들이 있다. 필자가 따로 인터뷰 할 시간이 없었지만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묻는다면 지성호 「북한인권포럼」 대표는 “자유와 인권”이라 답했을 것이다. 그의 강연은 주제는 그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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