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오늘 보따리를 풀어 꺼내는 이야기는 40년을 전후한 너무 짠하며 애잔한 이야기다. 나는 여천초등학교를 다녔고, 근처의 번개시장과 야음시장이 내려다보이는 곳에서 거주했다. 야음시장 내려가는 언덕 초입의 지금의 공영주차장에 진양화학 기숙사가 있었고, 야음시장 건너편에는 3층 건물의 유공사택이 고급사택으로 소재하고 있었다. 그 앞 도로변으로 중앙화단이 있을 무렵으로 본격적인 마이카 시대의 도래를 앞두고 차들이 한산하게 도심의 거리를 오갔다. 하루는 초등학교 친구 누나의 사고소식을 들었다. 태화강에서 나룻배를 타다가 같이 갔던 일행 몇이 익사사고를 당했다는 거였다. 친구 누나는 고등학생이었다. 그렇게 푸른 청춘인데도 잔인한 운명의 초대장을 거부하지 못했다. 그런 사고를 당한 가족들의 불행은 말하지 않아도 일평생을 따라가게 된다.
그 무렵 좀 가난했던 사람들은 슬레이트로 지어진 주택에 거주했지만 한창 적벽돌로 된 2층·3층 양옥들이 기세 좋게 올라가고 있었다. 내가 살던 동네에도 적벽돌로 지어진 건물들로 즐비했고 아직 건물이 들어서지 않았던 한 곳에 공터가 있었고, 그곳은 아이들이 즐겨 찾는 놀이터가 되었다. 그 공터에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작은 우물이 있었다. 하수관 공사할 때 쓰던 콘크리트 구조물로 된 것을 몇 개 이어서 땅에 박아 놓았는데 그것은 비가 오고나면 우물처럼 변해버렸다. 어느 날 동네 동생이 그곳에서 친구들과 놀다가 잘못해서 거꾸로 쳐박혀 버렸다. 아마 아이들은 그곳이 놀이터였기에 자기들끼리 장난치다가 무심결에 그렇게 됐을 것이다. 내가 그 현장에 있지는 않았지만 그곳의 지리나 구조를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사고를 당한 그 아이는 결국 재빠른 구조의 골든타임을 놓쳐서 그렇게도 어린 나이에 생사를 달리하고 말았다. 그 사고가 있은 뒤 그 우물 같던 구조물이 바로 폐쇄됐다.
한번은 동네 아이들이 놀던 마을 입구에서 덤프트럭의 브레이크 파열음이 고막을 찢을 듯 강하게 전해졌다. 아이들과 어른들이 그 소리에 놀라서 부리나케 현장으로 몰려들었다. 아직 어린 여아가 부모의 보호를 받지 못한 한 순간에 차량에 치이는 사고를 당한 것이었다. 곧이어 구급차와 경찰차 사이렌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길 양편에 늘어선 사람들은 조마조마한 심정과 안타까운 표정으로 현장을 지켜보며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어린 시절, 이제 막 인생은 무엇인가 어렴풋이 자각하며 자의식이 발달할 무렵 겪었던 이런 사건사고는 추억에서 소환해낼 때마다 아리다. 수십 년 세월이 흐른 지금에도 마치 나의 일인 듯 짠한 심정이 되며, 울적해지곤 한다.
미래를 미리 알고 있는 예언자처럼 사건사고에 대처할 수 있는 묘수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혹은 영화의 한 장면처럼 시간을 되돌려 사고 당하기 바로 직전의 순간으로 돌아간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우리 인생의 유한한 능력으로는 운명의 이름으로 다가오는 그 순간을 피할 수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종교에 의지하기도 하며 점을 치거나 사주팔자를 보기도 한다. 무술년 새해가 밝았고, 24절기의 마지막인 대한도 지났다. 조만간 입춘이 우리를 찾아온다. 그러면 겨우내 움츠렸던 몸과 마음을 봄볕에 보송보송 말려 아픈 과거도 아픈 흔적도 지울 수 있으리라. 2018년, 새순 돋는 꽃처럼 피어나며 밟아도 뿌리 뻗는 잔디처럼 운명을 헤쳐 나갈 수 있기를 가만히 희구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