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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정관 편집장 Oct 31. 2020

고래도시 울산, 내 고향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된 1950년 6.25전쟁은 한반도를 황무지와 폐허로 만들었다. 팔에 총상을 입었으나 전쟁이 끝나도 복무해야했던 부친은 5년을 채우고서야 제대할 수 있었다. 전후(戰後) 가난했던 나라에서 부친은 모친과 결혼하여 울진에서 오징어잡이 배를 타서 가족들을 부양했다. 그 일이 여의치 않았던 부친은 경북 청송에서 가내수공업 수준의 숯공장을 운영하다 떠밀려오듯 울산까지 이주해왔다. 



5남매 막내였던 나는 처용암 넘어가는 부곡이라는 곳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어릴 때 만수밭에서 자랐고, 지붕 없는 미술관으로 알려진 신화마을을 지나서 여천초등학교를 다녔다. 부두노조의 근로자였던 아버지는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했다. 저녁나절 퇴근할 무렵 아버지는 삶의 무게를 짓누르는 가난과 하루치의 피곤을 물리치고자 술에 의지해 불콰하게 취한 얼굴로 나타나기 일쑤였다. 내가 세숫대야에 물을 담아 아버지의 발을 씻을 때 술 냄새가 진하게 풍겨오곤 했다. 



세월이 지나 반백년을 살아보니 그 술 냄새는 고단한 아버지의 삶의 친구였는지 모르겠다. 또 하나 아버지의 친구는 주말마다 텔레비전 앞에서 추첨하던 주택복권 추첨이었다. 매주 아버지는 어김없이 주택복권을 구매해 맞추어봤는데 당첨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 당시의 주택복권은 지금 상품권보다 더 화려한 색감이었다는 기억만 어슴푸레 남아있다. 그 당시 한국비료를 오가던 화물을 실은 기차가 기적소리를 울리며 지나가곤했다. 



부지런한 어머니는 술빵을 만들어 팔기도 했는데 나중에는 맞벌이를 하며 생활전선에 뛰어들었고, 진양화학 동양나이론 같은 회사에서도 근무했다. 어릴 때 집에서 토끼를 길렀는데 형과 함께 부두까지 걸어가서 토끼풀을 뜯어와 먹이곤 했다. 백구를 길렀던 기억도 나는데 어느 날 가족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가축시장에 백구를 팔고 왔다. 형과 누나들이 울고불고 난리가 났고, 어린 나도 덩달아 따라 울었던 기억이 난다. 



형과 나는 낚시를 자주 다녔는데 명촌교 아래에서 바지춤을 걷고 들어가 물고기를 잡았다. 그때는 손을 집어 건지면 알 굵은 재첩도 많이 잡을 수 있었다. 또 지금 고래문화특구가 된 장생포나루에도 자주 갔는데 울산사람들이 꼬시래기라 부르는 망둥어가 정말 많이 낚였다. 아버지의 고생과 수고로 자녀들은 무럭무럭 자라 결혼하여 다음 세대를 이어가고 있다. 큰누나와 둘째누나는 어느새 할머니 소리를 듣고 있을 만큼 세월은 과거로 밀려났다. 



환갑을 채우지 못하고 병으로 돌아가신 아버지는 장생포 들어가는 초입에 있던 ‘추억사진관’에서 찍었던 가족사진 속에서만은 젊은 가장으로 늠름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만약 아버지가 주택복권에 당첨됐다면 어떤 계획이 있었고 이루어졌을까? 가족들과 세계 일주를 다녀왔을지도, 근사한 집을 한 채 지었을지 모를 일이다. 비록 아버지가 복권에 당첨되지는 못했지만 아버지가 꿈꾸었던 어지간한 일들은 우리나라의 발전과 울산의 공업도시로 탈바꿈으로 인해 제법 많이 성취됐다고 나는 생각한다. 



울산에서 회사를 다니다 매형과 결혼해서 서산에 살고 있는 막내누나 식구들 말고는 우리 가족들 모두 울산에서 그럭저럭 행복한 삶을 꾸려간다고 느끼고 있다. 때로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고, 때로 가정적인 위기도 있지만 그 또한 빛과 그림자처럼 우리 삶의 한 부분이지 않을까 여기는 것이다. 우리 가족들은 이사를 참 많이 다닌 덕에 야음동 번개시장 근처에 숙원(宿願)이던 작은 집 하나를 장만했다. 



아버지의 장례식이 치러진 집에서 온 가족들이 친인척들과 문상객을 맞았고, 선산이 있는 경북 아화의 묘소에 아버지를 모셨다. 아버지를 여의고 “나는 이제 어찌 살꼬?” 세상이 떠나갈듯 절규하던 어머니도 자녀들을 다 길러내고 느지막이 교회를 열심히 다니다가 치매증세가 와서 요양병원에 생활한지가 벌써 수년째다. 가난했던 시절 부모에게 꿈같던 집 한 채는 수년째 주인을 기다리며 쓸쓸히 비어있다. 



가난했던 아버지와 어머니 세대는 먹고사는 생활고를 해결하며 입에 풀칠하는 게 급선무였다. 그 자녀들은 부모가 땀 흘려 일군 나무의 열매를 따먹으면서 한결 나은 여유를 누리고 있다. 전국이 일일생활권에 들고 인터넷으로 정보는 차고 넘치지만 가족공동체가 예전 같은 결속력을 찾아보기 힘든 세태로 변했다. 가난의 대물림으로 일찍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던 큰누나가 하루는 동생들 전부를 불러 모아 용연 가는 14번 버스에 태웠다. 



그때 초등학생이어서 어렸던 내게 버스 창가로 보이는 공단 불빛의 야경은 얼마나 찬연했던가. 40년이나 지난 지금도 그 기억의 잔상은 어제 일처럼 선연하다. 세월이 지났어도 어떤 불꽃쇼보다 휘황찬란했던 그 불빛은 ‘쿵쾅쿵쾅’ 울산의 심장이 아무 일없이 잘 돌아간다는 증명이었다. 근자에 많은 사람들이 조선업의 위기와 울산 경제의 추락을 말한다. 그럼에도 뼛속까지 울산사람인 나는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이 오늘의 발전을 이루어냈듯이 우리가 한마음 한뜻이 된다면 울산은 다시 재도약할 수 있으리라 믿게 되는 것이다. 



이제 울산은 공업도시를 넘어 태화강의 기적으로 국가정원까지 성취했으니 문화 관광도시, 고래의 도시로 더 비약적인 성취를 가다듬을 수 있게 되었다. 나는 발행인과 더불어 신문을 창간해 편집장 7년차를 맞기까지 고래문화마을의 개관과 울산대교의 개통, 태화강동굴피아가 새로 열게 된 현장 등 수많은 현장을 탐방하며 수년간 지역신문에 칼럼의 소재로 삼아 투고했다. 또 울산 곳곳의 소소한 골목길까지 정겨운 눈으로 바라본바 평범한 소시민으로서 행복한 내용을 책으로 발간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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