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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정관 편집장 Nov 25. 2020

가족이라는 소중한 이름


고교를 졸업하고 서울에서 신학교를 다니던 30여 년 전 필자의 두 손에는 ‘부친 위독 급래요’라는 전보가 들려 있었다. 쿵쾅쿵쾅 두근거리는 마음을 애써 달래며 내가 밤새 울산에 고속버스로 도착하기도 전에 부친은 병원에서 돌아가셨다. 가족들은 아버지를 집에 모시고 장례를 치루고 있었다. 당시 경북 영천 인근의 집성촌의 친인척들은 문전성시를 이루며 혈육의 지상에서의 마지막 길을 애도하며 조문했다. 




필자가 마지막 임종을 지켜보지 못했지만 신의 이름으로 내가 기도하면 아버지는 살아나기라도 할 듯 잠자듯 평온해보였다. 아화의 선산에는 선조들의 봉분과 묘비들이 세월의 흔적을 증명하고 있었다. 수천만리 고향을 떠난 연어가 죽음을 앞두고 회귀하듯 시골길 좁은 길에 상여가 겨우 드나드는 그 길을 따라 아버지는 고향의 옛날 시간으로 거슬러 가고 있었다. 울산의 바닷바람을 맞으며 고단한 작업을 수행하는 근로자로 살았던 부친은 선조들과 나란히 누워 고향 산천의 춘하추동을 누리게 되었다. 




그때 아버지와 5남매를 낳으며 신산한 인생의 파란만장을 경험했던 어머니는 “이제 나는 어찌 살꼬!”하면서 대성통곡했다. 그리고 어느덧 30년 가까운 세월이 과거로 흘러갔다. 아버지가 돌아가셔도 외로워할 틈도 없이 어머니는 여태 그러했듯이 악착같이 직장생활을 해나가면서 자식들 뒷바라지에 열심을 다했다. 그나마 장성한 자녀들이 학업을 마치고 직장에 취업하니 어머니의 일손에 많은 보탬이 되었다.




그리고 장성한 자녀들은 시집가고 장가가고 결혼과 출산 육아 등으로 자신들의 둥지를 만들면서 하나둘 떠나갔다. 자식들은 모친의 노고를 잘 알기에 모친을 효도하면서 봉양했다. 어머니는 젊은 시절 남편 뒷바라지와 자식들 부양에 숱한 점쟁이들을 찾아갔고, 미신도 믿었다가 종국에는 하나님의 품안에서 애오라지 10여년을 헌신하면서 내세에 희망을 품었다. 이달 초 수년간의 요양병원 생활을 마친 어머니는 지상에서의 기도의 분량을 다 채우고 마침내 사랑하는 창조주의 품안에 안기게 되었다. 




환갑을 못 채운 아버지에 비해 83세로 비교적 장수한 모친의 마지막은 요양병원 생활이 길어 좀 아쉬운 것 빼고는 그래도 조금 덜 슬펐다. 장례의 모든 절차를 마치고 아버지와 합장하게 된 어머니는 이제 지상의 수고하고 무거운 모든 짐을 벗고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런 일련의 일들을 겪으면서 필자는 인생의 소중한 가치를 자연스레 체득하게 되었다. 




필자 이전의 부모세대만 하더라도 6.25전장을 온몸으로 지나오면서 생명의 소중함을 뼈저리게 경험한 세대이며 산업화의 기치 아래서 열심히 일하면서 힘들어도 희망을 품고 인생을 살아갈 수 있었다. 살다보면 일확천금을 노리는 쉬운 길도 있겠고, 거짓으로 남의 인생을 훔쳐 내 배를 불릴 수도 있겠지만 소시민들은 그저 ‘내게 주어진 이 길이 숙명이겠거니’ 하면서 순명하는 길을 따른다. 




고단한 인생길이지만 부모들이 남긴 가장 큰 유산은 다음세대를 잇는 새 생명이다. 자녀들의 출산이야말로 부모들에게 가장 큰 희망이요 기쁨인 것이다. ‘얘들이 언제 커서 어른이 되나’ 싶어도 세월의 힘은 아이들을 금세 어른으로 성장시킨다. 그리고 그 아이들이 노인이 된 부모들을 뒷바라지하게 되는 것이다. 이제 우리 앞에는 부모세대의 집성촌과 고향은 점차 사라지고 대신 도시의 소시민이라는 이름표가 주어진다. 




우리 세대는 가족 선산에 묻히겠지만 다음세대는 대부분 납골당이 지상의 마지막 휴식처가 될 지 모를 일이다. 우리 아이들은 가속화되는 핵가족화로 이제 혈연보다 이웃이나 친구, 동창들이 더 가까운 인생의 동반자가 되지는 않을는지...그러니 아등바등 살아갈 일이 무에 있으랴. 그저 기쁘게 살아가며 하늘을 떠받들 듯 내 가진 것 하나라도 이웃과 나눌 수 있다면 족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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