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세기 전에 한반도의 식민지배 한가운데서도 미래를 바라본 선각자들은 광복된 미래의 시간을 읽어내며 독립운동을 펼쳤고, 6.25 전장의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은 5천만 분의 1이라는 확률적 수치였음에도 그 작전을 개시했다. 그들의 피나는 노력은 그들의 바람대로 적중했다.
구약의 예레미야 예언자는 바벨론이라는 신흥강국의 침략 앞에 이스라엘의 풍전등화와 같은 민족적 위기의 때 토지를 구매했다. 모두가 가진 금은보화를 처분하고, 모두가 절망할 때 선지자의 행동은 어처구니없는 바보짓이었다. 그럼에도 신의 계시를 받은 예레미야의 의지는 바위처럼 굳건하며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70년 뒤 바벨론 포로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후손들은 그제야 예레미야의 예언의 적중을 믿게 되었다.
`이전에 지나보지 못한 길`이란 정부의 표현처럼 미증유의 사태를 겪으며 사람들은 차츰 코로나 시대에 적응하는 모양새다. 그럼에도 길어지는 전염병의 유행은 사람들의 일상을 망가뜨려 놓았다. 대면으로만 가능했던 술 한 잔의 여유도, 커피 한잔의 수다도, 식사하며 나누던 정담 등 기본적인 삶의 질서가 모두 자취를 감추었다.
더구나 코로나 시대를 지나며 경제적 어려움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많고, 십중팔구라는 표현이 틀리지 않을 만큼 살림살이가 팍팍해졌다. 경제적 위기를 넘어 생존의 문제의식을 가질 만큼 어려운 소시민들의 단말마의 비명이 곳곳에서 터져 나온다. 마스크를 썼을 때 곤란한 호흡처럼 기존에 우리가 익숙하게 여겼던 모든 것들이 낯설게 여겨진다. 전염병의 파장은 전 세계를 뒤덮고 있고, 그 기간은 수년을 꼽기도 한다. 그럼에도 속이 뻥 뚫리는 시원한 낭보와 좋은 뉴스는커녕 혼란한 정치계의 암울한 이전투구만 들려온다.
스포츠 신생종목인지 법무부장관과 검찰총장의 결투만 노상 보도된다. 가슴에 돌을 얹은 것처럼 답답하기만 한 위기의 때 지도자의 리더십은 그래서 절실하다. 난마같이 얽힌 문제를 하루아침에 풀어내라는 요구는 지나치다. 그러나 사람들 가슴의 응어리를 풀어주고, 미래와 희망을 이야기해도 낯설지 않아야 살아갈 용기가 생긴다. 더운 날 시원한 냉수 같은 예언자적 메시지가 절실하다. 희망을 말해도 낯설지 않아야하고, 미래를 이야기하면 사람들이 응원을 보내야한다.
사방이 에둘러 쌓였다고 이 시기를 그냥 죽은 시간으로만 계수할 것은 아니다. 위기는 오히려 기회의 장을 펼쳐놓기도 한다. 새로운 방법, 새로운 뜻과 전략이 그래서 필요하다. 항공기가 뜨지 않고, 국경의 장벽이 놓여있어도 화상회의를 통해서 상견례를 할 수도, 사업의 미래전략을 나눌 수 있다. 극장에서 상영하지 못한 최신영화는 인터넷 플랫폼을 통한 구매로 전 세계의 방구석에서 앉아서 볼 수 있게 되었다.
비대면으로 집안에서 필요한 생활용품을 구매하는 홈쇼핑의 거침없는 주문이 늘어나고 덩달아 택배산업은 증가일로를 걷고 있다. 모두 다 힘들다 할 때도 잘 되는 곳도 있는 법이다. 식당을 예로 들면 어려운 사정에 인건비를 아끼고, 월세를 맞춰 내기 위해 서비스는 그대로인 채 가격을 슬그머니 올린다면 발걸음을 아끼게 된다. 그럼에도 더 나은 서비스와 품질향상에 힘을 쓰는 곳은 한번이라도 더 방문하게 된다.
어려울 때는 버티는 것도 힘인데 소인배의 꼼수보다 대인배 다운 호탕함으로 승부해야 한다. 정부의 정책도 마찬가지이다. 미래를 말해도 어색하지 않고, 내일의 언어를 오늘로 호출해 사용해도 거부감이 없어야한다. 5년 정부가 100년 계획을 새롭게 하려니 시끄러운 소리가 많다. 게다가 코로나 상황이다. 지금이라도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국정운영을 펼쳐서 어려운 국민들의 호주머니에서 희망을 꺼내어 말할 수 있게 하길 바란다. 희망을 잃은 시대에 새 희망이 절실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