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이금희 발행인과 나는 울산대교 굽어보는 장생포 9번회센터를 찾아 점심을 먹었다. 그 바로 앞 선착장에 낚싯대를 드리운 두 명의 강태공은 작은 버너에 불을 붙이고 있었다. 잠시 후 라면을 드시는가 했더니 홍합탕을 끓인 모양이었다. 홍합껍질이 그 옆에 널브러져 있었고, 술이 좀 취한 아저씨는 울산대교 보이는 바다를 향해 바지춤을 내리더니 오줌을 시원하게 갈기며 흩뿌렸다. 우리는 회덥밥과 매운탕을 맛나게 먹고 난 후 고래문화마을에 들렀다. 월요일이 정기 휴무일인줄 모르는 관람객들에게 휴무라고 말해줬더니 실망한 눈치가 역력했지만 고래광장에 오르면 전망이 좋다고 했더니 내 말대로 따랐다. 고래문화마을에는 3월 말에 완공하는 모노레일 공사가 한창 분주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나는 카메라 가방을 어깨에 둘러메고 고래광장을 향했다. 기온이 10도가 넘는 햇살이 활동하기에 좋은 분위기를 선사하고 있었다. 겨울가뭄이 심해 정원과 나무에 수도꼭지에 호스를 연결해 물을 주는 아저씨들이 분주한 손놀림으로 일을 감당하고 있었다. 고래광장에 오르니 추운 겨울이 슬슬 물러날 채비를 하고 있는지 바람이 차지는 않았다. 고래문화마을이 개장할 때 식수했던 기념수는 그대로였지만 그 곁의 매화는 아직 꽃피울 낌새가 전혀 없었다.
아직 봄은 다가오기에는 시간이 걸리는 모양이다. 그 곳에도 모노레일 공사하는 인부들이 있었고, 포크레인이 요란한 엔진음을 울리며 바쁜 일손을 거들었다. 나는 고래조각공원에 우람한 모습으로 전시된 대왕고래와 범고래 혹등고래 밍크고래를 차례로 찍었다. 울산대교 주탑이 잘 보이도록 위치선정을 하면서 수 십 컷의 셔트를 눌러 사진을 담았다. 거리가 멀어 울산대교전망대는 손톱만큼 작게 나왔다. 내가 곧 다시 찾아올 때 물오른 매화나무 가지 끝에는 탐스런 꽃 봉우리가 찾아주어 고맙다며 반갑게 인사를 할 것이다. 70~80년대 장생포 옛마을의 모습을 간직한 고래문화마을에서 나는 인생살이가 고단해 술 취했던 아버지의 모습을 찾아낸다. 부두에서 무거운 짐을 하역하며 고생해서 집에 돌아오면 그 돈으로는 부자는커녕 자식부양도 힘들어 아버지는 술을 마셨던 것일까. 하루치 고단한 노동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아버지의 양말을 벗기고 세숫대야에 물을 받아 아버지 발을 씻기던 어린 막내는 어느덧 그 무렵 아버지의 나이였던 50살이 되었다.
세상 뜬지가 40년도 더 지난 아버지의 세대 문화와 유행이 고스란히 간직된 고래문화마을이 나에게는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촉매가 되는가보다. 아버지보다도 자식들을 아꼈던 어머니는 머리에 떡 담긴 소쿠리를 얹고 용연바닷가 끝자락까지 가서 노점상을 했고, 진양화학 동양나이론 등에서 하청 일을 억세게 감당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산업화의 기치를 감당하면서 힘들었던 부모세대들의 노고는 하늘이 알고 땅이 알 것이다. 3000리 짐자전거를 타고 부두까지 출퇴근했던 아버지와 척박해도 일거리가 있어 맞벌이했던 어머니의 고단한 노동이 자식들을 먹여 살렸다. 집집마다 자식들이 많아도 누나들이나 형들이 어울려 놀며 동생들을 챙기며 부모대신 키워냈다. 그때는 다들 그렇게 사는 줄 알았다.그시절에는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할 삶의 부유한 조건들이 넘쳐나지만 어째 그때나 지금이나 다들 인생살이가 힘들다고 하소연 하는지 모를 일이다. 겨울이 서서히 끝나 가면 저기서 곧 봄이 찾아들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