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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My Story

나도 알지 못했던 나의 꿈이야기

by 운아당

내가 기억하는 나의 유년 시절은 온 우주가 내가 생각하는 대로 돌아가는 마법 같은 세계였다. 나는 동네에서는 꼬마 새마을지도자였다. 친구들과 동네 길을 쓸기도 하고, 어려운 친구를 도우기 위해 모금운동도 했다. 또 어르신들을 모셔놓고 장기자랑을 개최하여 노래와 춤, 재치 있는 이야기로 위안잔치를 하기도 했다. 크리스마스 때는 교회 주일학교에서 성경암송이나 찬송, 연극으로 한껏 재능을 뽐내곤 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 진학을 할 형편이 아니었다. 중학교에 꼭 가고 싶었다. 1년간 친척집에 갔다. 아이를 봐주면 입학금 정도는 주지 않을까 생각하고 내가 스스로 가기를 청하였다. 겨우 13살 여자 아이, 부모를 떠나 낯선 도시에서 밤하늘을 쳐다보기만 해도 눈물이 났다. 1년이 지나면 나는 중학생이 될 거라는 희망을 안고 참고 견딜 수 있었다. 그런데 1년이 지났을 때 친척이 쥐어 준 돈은 입학금이 되지 않는 적은 금액이었다. 엄마는 한숨을 쉬며 어떻게 이웃에 빌려서 입학금을 내어 주었다. 중학생이 된 것이다.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공부하는 것이 참 재미있었다. 특히 영어와 국어를 좋아했다. 영어책을 통째로 외워버렸다. 문제집 살 돈이 없어 쉬는 시간 틈틈이 친구의 문제집으로 공부하기도 했다. 중학교 2학년 국어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장래 희망이 무엇인지를 묻는 시간이 있었다. 나는 그때 소설가가 되겠다고 했다. 제목은 '꽃이 피고 열매가 맺을 때까지'라고. 그 당시 나는 훌륭한 사람은 글을 잘 쓰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또 뭔가 나 자신을 표현하고 싶은데 억눌러 두었던 것들을 풀어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아버지는 여자는 빨리 시집을 가야지 고등학교는 뭐 하려고 가냐고 했다. 하지만 나는 몰래 고입시험을 쳤다. 그리고 우리 동네에서 나 혼자 명문인 여고에 합격하였다. 나는 초등학교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 남의 성장하는 모습을 보면 내가 좋고 다른 사람에게 가르치고 설명하는 것을 잘했고, 특히 아이들을 좋아하는 나의 성격이 적성에 맞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려운 형편에 대학은 꿈도 꾸지 못했다.


꿈이 무엇인지,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잘하는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바로 일을 시작했다. 그리고 결혼을 하고 1남 2녀의 엄마가 되었다. 앞만 보고 달려도 허덕거리는 시간들이었다. 하지만 늘 대학을 가지 못한 아쉬움이 있었기에 야간 대학 영어과를 졸업하였다. 국제화 열풍에 뭔가 훌륭한 사람이 되려면 영어를 잘해야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업무도 늘 국제교류 관련 업무 부서에서 일했다. 직장에서 미국연수도 경비를 지원받아 6개월 다녀왔다. 그리고 심리학 공부에 뜻이 있어 대학원 교육심리전공 석사학위도 취득하였다.


그렇게 배움에 대한 욕구를 쫓아 바쁘게 살아왔다. 그런데 뒤돌아 보면 나는 늘 글쓰기에 대한 갈증이 있었다. 진주시명예기자, 경상남도명예기자, 한국대학신문명예기자, 블로그, 밴드 등 글쓰기를 기웃거려 왔다. 내가 늘 글쓰기를 갈망하여 왔던 것은 나의 깊숙이 억눌려 있던 내면 아이가 성장하고픈 아우성을 치고 있어 그런 것인지 모르겠다. 나도 알지 못했던 나의 꿈이 나를 그 방향으로 바라보게 했나 보다.


이제 세상의 시간표에서 빠져나왔다. 사회적 시간에 끌려다니지 않아도 된다. 지금은 내가 하고 싶은 일은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시간이다. 다만 할 수 없다는 생각의 틀을 깨는 일이 꿈을 실현할 수 있는 첫 발자국이라 생각한다. 글을 쓰는 사람, 즉 작가가 되어 그동안 움츠려 있던 나의 자아에 날개를 달아주는 것이 나의 꿈임을 깨닫는다. 그래, 나도 몰랐던 나의 꿈은 작가가 되는 것이다. 비록 타고난 재능이 있는 것이 아니더라도, 심연에 가라앉아 있는 나의 진짜 욕구를 드러내는 일이더라도, 그것으로 족하다. 지리산 행복 글쓰기 수업은 그렇게 끌림의 법칙에 의해 나에게로 왔다. 그리고 브런치라는 글쓰는 플랫폼으로 확장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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