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소설
불안한 끝순이의 얼굴을 보고 나는 걸음을 멈추었다. 오십여 년 전, 어린 시절 함께 뛰놀던 동네 친구. 죽마고우였던 우리는 세월이 흘러 다시 만났고, 마치 시간의 강을 건너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 듯 자주 연락하며 지내고 있다.
끝순이는 일곱 딸 중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이제 딸은 그만 낳자”는 뜻으로 그녀에게 ‘끝순’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신기하게도 곧이어 여덟째, 집안의 귀한 종손인 아들이 태어났다. 그 순간부터 끝순이의 삶은 남동생을 위한 그림자와도 같았다.
그날은 4월의 햇살이 교회 앞마당을 따뜻하게 비추던 일요일이었다. 모두가 평화롭게 담소를 나누던 그 풍경 속에서 유독 창백하게 서 있던 끝순이의 모습은 내 눈에 오래 머물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녀는 교회에 나오지 않았다. 전화를 걸어 권유한 끝에 오랜만에 발걸음을 옮긴 날이었다. 예전에도 끝순이는 “하나님 말씀을 어기면 벌을 받는다”는 설교를 들을 때마다 마음이 쪼여오고 무섭다고 말했었다. 하필 그날 목사님의 설교는 솔로몬이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결국 벌을 받았다는 내용이었다. “성경도 안 읽고 기도도 안 하면서 유튜브만 보는 사람은 두 마음을 품은 자”라며 책망을 강조하는 말씀이 이어졌다.
끝순이의 표정은 금세 바뀌었다. 그녀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싶지만 자꾸 벌이 먼저 떠오른다”며 힘겹게 고백했다. 그 말 속에는 어린 시절부터 쌓여온 상처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끝순이는 늘 남동생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며 살아야 했다. 귀한 종손은 아버지와 마주 앉아 쌀밥을 먹었지만, 그녀는 옆에서 보리밥을 먹으며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남동생이 넘어지기라도 하면 엄마의 회초리는 끝순이를 향했다. 어린 시절부터 ‘없는 듯이 살아야 한다’는 굴레 속에서 그녀의 자리는 언제나 비켜나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희생을 강요하는 말, 뭔가를 잘해야만 사랑받을 수 있다는 분위기 앞에서 그녀의 가슴은 늘 돌덩이처럼 무거워졌다. 교회에서조차 비슷한 설교를 들으면 하나님조차 무서운 분으로만 다가왔다.
그러나 나는 문득 생각했다. 끝순이가 두려워하는 것은 어쩌면 하나님 그 자체가 아닐지도 모른다고. 그것은 오히려 어린 시절 속에 새겨진 아버지의 그림자, “잘해야만 사랑받는다”는 굴레가 만든 두려움일 수 있다.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닌데도 마음은 옛 기억의 방식으로 하나님을 해석해 버린 것이다.
그 사실을 조금씩 깨달아가는 순간, 끝순이의 눈동자가 서서히 맑아졌다. 마치 햇살 속에 반짝이는 커피잔처럼, 마음 한구석이 환히 빛을 받는 듯했다.
(2025. 4.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