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이었다. 엄마가 외할머니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본 날 저녁은 초승달이 희멀겋게 뜬 날이었다. 한밤중이었다. 그때는 시계가 없었으니 잘 몰라도 저녁 9시경 되었을까. 엄마는 낮에 콩밭을 매고 고단해 자리에 누우려 하는데 밖에서 인적 소리가 났다. 외할머니였다. 쌀자루와 미역 한 줄을 머리에 이고 10리 길을 걸어서 왔다. 나를 낳고 닷새째 되는 날이었다.
외할머니는 거창군 위천면 대정리 황산마을에 살았다. 엄마는 거창군 북상면에 살던 아버지에게 시집을 왔다. 6.25.전쟁이 나자, 빨치산을 잡기 위해 소개령을 실시하는 바람에 맨몸으로 북상면에서 빠져나와 고모가 살고 있던 위천면 강천리에 피난와서 살고 있었다. 엄마의 결혼과 아버지 집안 이야기는 다음에 하겠다. 외할머니의 마지막 모습은 엄마의 가슴에 피멍으로 남아 있어 살아오는 내내 아려왔다.
외할머니는 선걸음으로 쌀과 미역을 내려놓고 서둘러 대문을 나가면서 나지막하게 말했다.
"조리를 잘해라. 그래야 나중에 고생 안 한다. 아직 조리 중인데 나오지 말고 들어가라. 춥다 어서 들어가라."
손을 휘이휘이 저으며 엄마에게 어서 집에 들어가라고 하는데 그날 따라 외할머니의 뒷모습을 보는데 그렇게 쓸쓸하고 고맙고 안타깝고 서럽고 미안하고 불쌍하고 말할 수 없는 감정이 교차하였다. 싸리문 밖으로 따라가며 외할머니의 채근에 집으로 발걸음을 돌릴라해도 자꾸만 외할머니 모습을 더 보기 위해 머뭇거려졌다. 하늘엔 초승달빛이 희멀건한데 외할머니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섰다.
엄마는 나즈막하게 '엄마'라 부르는데 외할머니가 먼 발치에서 돌아보며 다시 들어가라는 손짓을 했다. 왜그렇게 슬픈지 눈물이 나서 방에 들어와 밤새 울었다. 엄마의 형편을 잘 알고 있던 외할머니는 머리에 쌀을 이고 추운 밤에 걸어서 아이를 낳고 밥도 못먹을까 하여 캄캄한 산길을 왔다가 다시 혼자 산을 넘어 갈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메여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외할머니는 그날뿐이 아니라 가끔 저녁밥 먹고 들어가 자려고 하는 시간에 쌀을 갖다주곤 했다.
"암만케도 오빠 내외가 있으니 낮에 쌀을 들고 나오기가 어렵지 않았나 싶다. 그리고 동네사람들 눈도 어려웠겠재. 고방에서 매일 한 줌씩 쌀을 모았다가 가져오지 않았을까 싶기도 해. 오빠도 가져간다고 뭐라 하진 않겠지만 엄마입장에서 며느리도 있으니 눈치가 보였겠지."
그런데 이튿날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소식을 친정 머슴이 가져온 것이다. 외할머니가 갑자기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외할머니는 이튿날 새벽에 평일 처럼 교회 새벽기도를 다녀왔다. 잠시 눈을 부쳤다가 일어나 머리가 어지럽고 아프다고 하더니 다시 방에 들어가 누워서 자길래 괜찮은가 했는데 점심 식사 때도 안 일어나서 외삼촌이 깨우니 돌아가신 후였다.
"요즘 생각하면 아마도 뇌출혈이 아니었나 싶어. 요새 같으모 병원 빨리 데려갔으모 나았을지 모르지."
엄마는 손수건으로 연신 눈물을 닦는다. 그때 외할머니 연세가 오십대였다.
"친정집 머슴이 부음을 전하는데 나는 기절을 했지. 정신을 차려서 머리를 풀고 친정으로 갔는데 너무 무서운기라. 누워있는 엄마에게 마지막 인사를 드리라 하는데 엄청난 무섬증이 들었어. 아이고 내 딸 왔나 하며 내 머리를 확 잡아 체는 느낌이 들어서 무서워 그 방을 들어갈 수가 없더라니께. 마당에서 울고 장사를 치르고 집에 돌아왔는데 다시 친정집 가기가 싫어지더라. 아마도 엄마가 내가 너무 슬픔에 빠질까 봐 정을 떼려고 그랬나 봐."
엄마는 외할머니 이야기를 가끔 했다. 먹고살기 힘든 이야기가 나오면 언제나 첫 스토리는 외할머니 이야기다. 가슴에 사무친 애달픔이다. 엄마는 그럴 때마다 꺼억꺼억 울음을 토해낸다. 어린아이처럼 두 손으로 눈을 가리고 운다. 96년 인생에 얼굴 주름만큼 굴곡진 사연도 많을 것이다. 나는 오늘 처음 듣는 듯이 함께 울고, 엄마 손을 잡아 드리고 안아 드렸다. 그리고 한 번도 만나 뵌 적이 없는 외할머니에게 감사 기도와 영원한 평안과 명복을 빌어 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