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할머니다. 엄마는 엄마의 엄마를 가슴에 품고 살았다. 나는 엄마를 가슴에 품고 살았다. 나의 딸은 또 엄마인 나를 품고 살겠지. 이렇게 엄마라는 존재는 생명의 태동이고 근원이고 이체동심이다.
엄마는 외할머니 이야기를 하면 언제난 눈시울이 붉어진다. 애잔하고 슬프기도 하고 마음껏 나누지 못한 사랑이 아닐까 짐작한다.
엄마의 고향은 거창군 위천면 대정리 황산마을이다. 황산마을에는 거창의 유명한 관광지 수승대가 있다. 거창은 산세가 아름답고 물이 맑고 계곡이 깊다. 황산마을은 500년 역사를 가진 거창 신씨들의 집성촌이라 지금도 신씨고가저택이 경남도문화재로 지정되어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다. 엄마는 고향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였고 살아가는데 규범이 되는 것 같았다. 어릴 적부터 배워 온 몸에 밴 말이나 행동이 반듯하였고, 어려운 환경에서도 품위를 잃지 않았다. 내가 자랄 때는 엄마가 큰소리로 떠들거나 우리를 나무라거나 대성통곡을 하거나 동네사람들과 싸우거나 욕을 하거나 아버지에게 달려들거나 하는 일을 보지 못했다. 그런데 노년에 들어서서 조금 변하긴 했지만.
나는 외조부모님, 친조부모님을 한번도 뵌 적이 없다. 내가 태어나기 전에 모두 돌아가겼다. 그래서 할아버지 할머니가 있는 친구들이 참 부럽기도 했다. 외할머니 외할아버지에 관한 단편적인 이야기들도 내 나이 육십이 넘어서 엄마와 한가로운 시간이 되었을 때야 듣게 되었다.
"그때 황산마을에 큰 물난리가 났대. 우리집이 계곡 옆에 있었는데 자고 일어나니 동네가 떠들썩 했다고해. 물난리가 났다고 사람들이 고함을 지르고 골목을 빠져나갔다고 하더마."
엄마의 나이를 거슬러 계산해보면 1920년대 쯤이다.
"물난리다. 피하시오. 산사태가 나서 바위가 굴러 내려옵니다."
동네 사람이 큰소리로 위급상황을 알리는 말을 듣고 외할아버지는 아픈 증조 외할아버지를 업고 집 앞 감나무 위에 올라갔다. 증조외할머니는 손자 3명을 데리고 동네 밖으로 피신하였다. 폭우가 쏟아지자 뒷산이 무너져 내려 산사태가 나서 바위가 떠내려오고 물이 벽처럼 서서 내려왔다고 한다. 그런데 큰 외할머니는 사당에 있는 위패를 가지러 들어갔다가 참변을 당했다. 종손 집안의 종부로서 사당에 위패를 지키는 일은 목숨보다 귀한 일이었다.
외할아버지는 순식간에 홀아비가 되었다. 종손이었다. 물난리가 끝나고 증조외할아버지도 충격으로 돌아가시고 증조외할머니도 이어 돌아가셨다. 종중에서는 외할아버지의 재혼을 서둘렀다. 당장 어린 아들 3명을 돌볼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고 돌아가신 부모님 3년상도 치러야한다. 또한 종손이니 종부의 자리를 비워둘 수 없었다. 외할머니가 신씨 가문에 열 두살 많은 남편에, 아들 세 명이 딸린 집에 시집 오게 된 발단이 된 이야기이다.
그때 외할머니는 꽃다운 열여섯 낭자였다. 거창군 위천면 모동리라는 동네 살았다. 외할머니는 강씨였고 모동리는 강씨 집성촌이었다. 외할머니는 그 동네에서 가장 부유한 집이었고 귀하게 자란 고명딸이었다. 머지않는 곳에 물난리가 있었고 좋은 집안의 종손이 졸지에 홀아비가 되었는데 종부를 구하는 혼처 소식이 들려왔다. 그 당시에는 있는 집안에 종부 자리는 명예와 권위의 상징이었다고 한다. 외할머니의 아버지는 흔쾌히 딸을 시집보내기로 승락을 했다. 그때는 부모의 결정에 따라 결혼이 맺어졌으니 거절도 못했다.
1921년 경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는 결혼을 하였다. 외할머니가 시집을 오니 아래체에 빈소를 마련하고 3년상을 하고 있었는데 위패가 4개가 있었다. 물난리에 졸지에 한날 사망한 사람들이었다. 시아버지, 시어머니, 전처, 시동생이다. 삼시세끼 식사를 올리며 살아 계신 듯이 모셨다. 소설 속에서나 나올 법한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가 만나게 된 사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