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할머니는 시아버지, 시어머니, 전처, 시동생의 위패 4개를 사당에 모시고 3년 상을 치러야 했고, 전처 아들 3명은 9살, 7살, 5살이었다. 불난리난 집에는 재라도 있지만 물난리가 난 시집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솥이며 가재도구, 이불 한 자락도 없이 다 떠내려갔다. 다행히 종갓집이라 집안에서 집을 새로 지어주었고, 가재도구도 마련해 주었다.
논밭을 경작했으나 먹을 것이 늘 모자랐다. 외할아버지는 서당에서 동네 아이들 글을 가르치고 농사일은 하지 않았다. 머슴이 2명 있었으나 농사일을 도와줄 뿐, 가사는 혼자 몫이었다. 종갓집에 3년상을 치르고 있으니 손님은 날마다 사랑방으로 모였다. 집안의 어른들은 종갓집에 와서 며칠을 묵다가 돌아갔다. 그들의 식사며 심부름은 종부 몫이었다. 외할아버지는 종중일을 도맡아 하느라 집안일은 전혀 하지 않았다. 외할머니는 부모님으로부터 교육을 잘 받아 집안을 잘 이끌어 나갔다. 전처 아이들도 정성을 다하여 잘 양육하였다.
나의 엄마 신순옥 여사는 1929년 2월 28일 태어났다. 2남 3녀 중 셋째였다. 엄마가 태어난 해가 전처가 낳은 장손이 17세가 되는 해였고, 혼인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장손은 이제 종갓집 주인이 되었으니 외할머니를 분가해 나가길 요구했다. 사별하고 후처로 들어와 집안을 세웠건만 자신의 어머니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외할머니는 아직 돌도 지나지 않은 핏덩이 엄마와 아들, 딸, 3 자녀를 데리고 멀지 않은 이웃에 집을 얻어 이사를 하였다.
이때가 외할머니에게나 나의 엄마에게는 가장 힘든 시기였다. 고난이 시작된 것이다. 종갓집을 차지하고 있는 장손은 경제적 지원을 아예 끊었다. 외할머니는 어린 엄마를 업고 농사일과 바느질, 혼사 있는 집에 일을 도와주고 곡식을 구해오는 일로 자녀 3명을 키웠다. 바느질 솜씨가 좋아서 엄마를 찾는 사람들이 많았고 멀리 다른 동네에서도 일감을 많이 맡겼다. 외할머니는 차분하고 정이 많고 솜씨가 야무졌다. 한번 일을 맡긴 집에서는 계속 일을 부탁했다. 외할아버지가 가끔 곡식을 가져오곤 했지만, 장손이 살림을 차고앉아서 함부로 빼내올 수도 없었다고 한다. 외할아버지는 주로 종갓집에 거주하고 가끔 외할머니댁에 와서 지내고 가곤 했다.
엄마는 외할머니만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고 한다. 내가 엄마만 생각하면 눈물이 나듯이.
엄마는 어느 날 외할머니가 한 말을 나에게 들려주며 또 눈이 촉촉해진다.
"엄마는 나를 낳고 먹을 것이 없고, 큰 아이들은 배가 고파 울고 있으니 나를 키울 수 없겠더래. 냄새가 지독한 화장실에 가서 일부러 오래 앉아 있다 나오곤 했다고 하더라. 독한 똥냄새를 맡으면 어린 핏덩이인 내가 숨이 막혀 죽지 않을까 싶었다네. 큰 아이들도 못 먹고 있으니 눈도 제대로 못 뜨고 말도 못 하는 어린것이 죽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더마. 그 말을 듣고 내가 너무 슬퍼서 엄마를 안고 울었다."
숨죽여 듣고 있던 나도 기가 막힌 슬픔에 뼈 밖에 남지 않은 엄마를 꼭 안고 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