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라이! 내 친구

잊혀진 이야기

by 운아당

인생을 마라톤 하듯 달려온 나는 갑자기 우두커니 혼자 서있다. 나는 무얼 찾아서 멀리멀리 갔던 것일까. 이제 수레바퀴에서 내려 숨을 고르고 보니 그 옛날 나의 아름다운 유년의 기억이 떠올랐다. 마음껏 뛰어놀던 그곳이 그리워 내 고향의 그 골목을 찾아갔다. 따뜻한 사랑을 느낄 수 있게 했던 교회, 윗동네 아랫동네 그 많던 친구들, 파란 하늘 아래 뛰놀던 들판이며 뒷산, 그 어느 것도 온전히 남아 있는 것은 없다.


언덕에 새로 지은 교회에 들렀더니 마스크를 했는데도 나를 알아보고 반가이 인사를 하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은석이었다. 은석이는 나랑 같은 나이고, 그의 어머니는 나를 다섯 살부터 교회에 데리고 다닌 분이었다. 나는 은석이 동생들을 내 동생처럼 업어주고 데리고 놀기를 좋아했기에 우리는 거의 가족처럼 지내던 사이였다.


너무 반가웠다. 마침 점심시간이라 가까운 식당에 갔다. 어릴 적 장난기가 많았던 그 친구는 지금도 여전히 유쾌하고 시원하게 말을 잘한다. 수십 년의 세월이 순식간에 되돌아 간 느낌이다. 그렇게 오랜 기간 동안 만나지 못했는데 어쩜 이렇게 어제 본 것 같이 거리낌 없이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우리는 자연히 멀어졌다. 은석이가 우리 동네에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이사를 갔기 때문이다. 은석이는 중학교를 입학했으나 집안형편이 어려워 이학년 때 자퇴를 했다.

은석의 아버지는 시내버스회사에 사무실에서 일했다. 하지만 월급은 다섯 자녀를 돌보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것이었다. 은석이가 자퇴를 하자 그는 아들에게 버스 차장을 하라고 했다. 지금처럼 버스문이 자동으로 열리기 전에는, 버스에 승객이 타고 내릴 때 문을 열어주는 사람을 차장이라고 했다. 차장은 더 많은 승객을 태우기 위해 "안으로 들어가세요. 오라이!"라고 소리치며 사람들을 밀어 넣기도 했다.


은석이는 새벽 4시면 나가서 저녁 12시가 넘어서야 귀가를 했다. 겨우 열다섯 살이었다. 하루 종일 버스 문 앞에 서서 있어야 하는 직업이라 허리며 다리가 아팠다. 교복 입은 친구들이 버스를 탈 때마다 모자를 푹 눌러쓰곤 했다. 그는 어린 나이에 차장일을 시킨 아버지가 한없이 원망스러웠고, 너무 힘들어서 어느 날 죽어야겠다고 결심했다.


촉석루 서장대 위에서 남강 아래를 바라보니 심장이 미친 듯이 떨렸다. 눈을 질끈 감고 뛰어내리려고 하는데 갑자기 뒤에서 배고파서 우는 동생 울음소리가 들렸다. 머리를 한 대 맞은 느낌이었다. '내가 없어지면 엄마 없는 동생들은 어떻게 하지? 나만 고생하면 동생들은 배부를 수 있어. 고구마라도 사서 먹일 수 있어' 하는 생각에 다시 신발을 신고 계단을 내려왔다. 하지만 은석이는 그 이후에도 촉석루를 몇 번을 올라갔다가 내려왔는지 모른다고 한다.


나는 그 친구 가정이 그렇게 어려운 가정환경인 줄 몰랐다. 그의 아버지는 매일아침 양복을 입고 넥타이를 매고 다녔기에 잘 사는 집으로 여겼다. 내 기억 속 그의 어머니는 호탕하고 긍정적인 사람이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아마도 그때부터 형편이 기울어졌던 것 같다. 은석이는 차장을 10년 동안 계속하다가 25세 즈음에 운전을 배워서 버스 기사가 되었다. 지금도 시내버스 운전을 한다. 덕분에 교회에서 차량 봉사를 할 수 있다며 그가 웃었다.


그 친구와 나는 육십 년 전으로 되돌아가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서로의 아픔을 나누다가 집으로 왔다. 같은 기억을 공유하고, 같은 장소에서 일어난 추억을 나누는 것만으로 깊은 위로를 받았다. 우리는 각자가 굽이굽이 삶의 능선을 타고 서로의 길을 걸어 멀리 갔다가 다시 돌아와 새로운 출발점에 서있다.

(2023.10.14.<그곳에 내가 있었다>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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