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해서 아름다운, 플레이트

아이반코 플레이트

by 박보라

지난 주말. 우연히 파주의 한 헬스장에 가게 됐다. 입구에서부터 공기가 달랐다. 화려한 조명이나 세련된 인테리어는 없었다. 심지어 카운터도 없었다. 대신 검은색 기구들이 빽빽하게 들어찼고, 그 사이사이는 오후의 나른한 햇빛이 채웠다. 무채색 옷을 입고 검은 머신 사이를 오가는 사람들은 숨소리를 내뱉으며 각자의 무게에 집중하고 있었다. 공간 전체에 퍼진 금속음과 마찰음과 조용한 음악. 그것들이 성격을 명확히 규정하는 듯 했다.


나 역시 그 흐름에 섞여 운동의 밀도를 높여갔다. 그러다 세트 사이 휴식 시간. 거치대에 무심히 꽂혀 있는 플레이트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은은한 녹색빛이 감도는 노란 은행잎 같은 색의 아이반코(IVANKO) 플레이트. 나는 다음 세트를 잊고 한참 동안 그 플레이트를 바라보았다.


평소 쓰던 검은색 고무 플레이트와는 분위기가 달랐다. 우리가 흔히 접하는 고무 원판은 실용성에 충실하다. 바닥에 두었을 때, 그때의 충격을 흡수하고 소음을 줄여준다. 하지만 그 두툼한 외피는 내부의 실체를 가린다. 그 무게가 무엇으로 채워져 있는 지는 모른다. 모자란 무게는 고무를 덧대 맞출 수 있고. 고무는 사용자의 안전을 보장하지만, 동시에 원판이 가진 본질적인 결함이나 투박함은 살짝 가린다. 고무 원판을 다룰 때 느껴지는 둔탁함. 그건 안전함이라는 명목 아래 많은 것을 생략하고 있다.


반면 눈앞의 아이반코 플레이트는 금속의 얼굴을 그대로 드러냈다. 표면에는 정밀하게 깎여 나간 동심원 몇개가 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색이 칠해져 있긴 했지만, 그 속에서도 쇠 특유의 서늘한 색감은 그대로 드러났다. 단순히 찍어낸 덩어리가 아니라, 예민하게 연마된 도구라는 인상을 주었다. 화려하게 꾸미지 않았는데도 시선을 끄는 힘이 있었다. 플레이트의 단면에서 뿜어져 나오는 정갈한 실루엣을 보며 생각했다. 아, 운동에도 분위기가 있을 수 있구나. 바벨에 원판을 끼우는 사소한 동작조차 하나의 의식처럼 느껴지게 만드는, 흐트러진 마음을 단번에 다잡아주는 디자인이었다.


이 직관적인 미학의 근거를 찾아봤다. 그리곤 설립자 톰 린시어(Tom Lincir)의 고집을 발견했다. 1957년에 시작된 아이반코의 역사는 ‘오차 없는 무게’를 향한 집착으로 요약된다. 당시 유통되던 대부분의 원판은 실제 표기된 무게와 큰 차이가 났고, 구멍의 크기도 제각각이라 바벨에 끼우면 덜렁거리기 일쑤였다고 한다. 톰 린시어는 이를 견디지 못했다. 그는 플레이트를 단순히 무거운 물건이 아니라 수학적인 완결체로 보았다. 주물에서 나온 원판을 다시 깎고 다듬어 완벽한 수평과 무게를 맞추는 공정을 도입했다.


플레이트 표면의 정교한 결들은 예쁘게 보이기 위해 만든 것이 아니다. 0.5%에서 2% 내외라는 극도로 낮은 오차 범위를 맞추기 위해 불필요한 무게를 덜어낸 흔적이었다. 정확한 무게를 구현하는 과정 자체가 곧 디자인이 된 셈이다.


"아름답기 위해 만드는 것이 아니라, 정확하게 만들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

이라는 그들의 방식은 도구가 가질 수 있는 최선의 정직함을 보여준다. 어떤 수식어도 빌리지 않고 오직 기능의 정점에서 스스로를 증명하는 식이다.


세트 사이사이, 머신을 오가면서도 여러변 아이반코를 돌아보았다. 우리는 종종 자신의 빈틈이나 부족함을 고무 껍질로 포장하며 살아간다. 실체보다 부피를 부풀리고, 거친 단면을 매끄러운 수식어로 덮는다. 그렇게 만들어진 무게는 당장은 안전해 보일지 모르지만, 결국 결정적인 순간에 오차를 드러낸다. 정직하게 깎아내고 다듬어서 포장을 걷어내도, 그 자체로 단단한 본질을 갖는 일은 생각보다 어렵다


파주의 헬스장에서 마주친 그 원판은 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껍질을 씌워 적당히 부풀려진 무게로 살 것인지, 아니면 정교하게 가공된 본질을 가질 것인가. 꾸며진 아름다움이 아닌, 오직 정직한 밀도만이 가질 수 있는 기량. 20kg이라는 숫자가 적힌 은행빛 로고의 원판은, 쇳덩이의 차가운 질감만큼이나 선명한 교훈을 남겼다. 본질에 충실한 것은 그 자체로 가장 강력한 미학이 된다는 사실을.


https://www.youtube.com/shorts/XNOdPfzbTJ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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