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의 바운더리를 긋는 기술
[무한한 자유는 없다]
“저는 딱히 가리는 사람 없어요. 다 잘 지내요.”
“저는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싶어요.”
겉보기엔 아주 쿨하고 포용적인 말들이다. 사람들은 넓은 발을 자랑으로 여기고, 24시간 정보에 접속해 있는 것을 능력이라 믿는다. 개방성은 미덕이고, 폐쇄성은 꼰대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시대다. 하지만 수학을 좋아하는 사람, 한계 중량을 들어 올리는 사람의 눈으로 볼 때 저 말은 위험하다.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는 말은, ‘아무것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다’는 말과 동의어와 같기 때문에.
수학에서 함수를 셋팅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상황은 멋진 공식이나 복잡한 그래프가 아니다. 바로 정의역(Domain)을 설정하는 것이다. 함수란 입력값(x)을 넣으면 출력값(y)이 나오는 기계다. 그런데 이 기계는 아무 숫자나 다 받아주는 건 아니다.
예를 들어 y = x라는 함수가 있다고 치자. 이때 x에 음수(-)가 들어오면 어떻게 되는가? 시스템은 오류를 일으킨다. 실수 체계에서는 계산할 수 없는 허수가 나오거나, 값 자체가 존재하지 않게 된다. 또 y=1/x 라는 함수에 ‘0’을 집어넣으면? 수학적으로 불능(Undefined) 상태가 되어 연산 결과값이 출력되지 않는다.
그래서 수학은 엄격하게 선언한다.
y = x가 작동하려면, x는 0보다 크거나 같아야 한다.
y=1/x가 작동하려면 x는 0이 되면 안된다.
이것이 정의역이다. 유효한 결과값을 내기 위해, 내가 받아들일 입력값의 범위를 사전에 제한하는 것. 이것이 전제되지 않은 함수는 함수가 아니다. 그저 숫자, 노이즈일 뿐.
인생도 마찬가지다. 당신이라는 함수(f)가 고장 나는 이유는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정의역을 설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해독할 수 없는 유해한 관계, 처리할 수 없는 쓰레기 정보, 감당할 수 없는 타인의 감정까지 무차별적으로 x값에 집어넣고 있으니, 당신의 인생 함수가 불능 상태에 빠지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지 않을까.
[닫힌 문이 힘을 만든다]
헬스장에서도 이 원리는 똑같이 적용된다. 이를 우리는 고립(Isolation)이라 부른다. 벤치프레스를 하려는 사람을 관찰해 보자. 그는 벤치에 눕기 전, 가장 먼저 발의 위치를 잡고, 엉덩이를 붙이고, 어깨를 뒤로 모아 단단히 고정한다. 이것을 셋업(Setup)이라고 한다. 이 셋업 과정은 본질적으로 제한하는 행위다. 다리 힘은 쓰지 않고 어깨의 개입도 최소화하며 오직 가슴 근육의 수축만 입력값으로 받아들이겠다는.
만약 어떤 사람이 “나는 온몸의 근육을 다 써서 자유롭게 들 거야”라며 몸을 비틀고 다리를 버둥거린다면? 무게는 들릴지 몰라도, 타겟 근육인 가슴은 전혀 성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관절이 갈려 나간다. 힘이 분산되기 때문에. 에너지는 갇혀 있을 때 폭발한다. 댐이 물을 가둬야 전기를 생산하고, 총신이 화약을 가둬야 총알이 나간다. 사방이 뚫린 댐, 총신 없는 총알은 아무런 위력이 없다.
학습도 마찬가지다. 학습이란, 뇌의 에너지를 한 점에 모아 무지의 벽을 뚫는 작업이다. 그런데 공부하는 도중 울리는 카톡에 신경 쓰고, 친구와의 갈등 때문에 감정을 소모하고, 숏폼 영상에 뇌세포를 내어준다면? 당신의 에너지는 벽을 뚫기 전에 공중으로 흩어진다. 그것은 공부가 아니라, 그저 책상 앞에 앉아 에너지를 누수시키는 공회전일 뿐이다.
[관계의 정의역 : 성적, 성과는 고독에서 만들어진다]
우리는 종종 ‘인맥이 넓어야 성공한다’는 강박에 시달릴 때가 있다. 하지만 냉정하게 말해, 학습자의 관점에서 불필요한 관계는 인지 부하를 일으키는 주범이다. 수학에서 y=1/x 함수의 x에 0을 넣으면 안 되는 이유는, 그것이 시스템 전체를 붕괴시키기 때문이다. 인간관계에도 나를 0으로 나누려는 사람들이 있다. 세상 만사가 불만인 사람, 오늘만 놀자며 내 루틴을 흔드는 사람. 이들은 나의 학습 함수에 들어와서는 안 되는 에러 값이다.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다 보면, 성적이 정체된 아이들의 공통점을 발견한다. 머리가 나쁜 게 아니다. 관계의 연비가 나쁜 경우가 많다. 수학 문제를 풀면서도 친구와 나눈 대화를 곱씹고, 쉬는 시간 10분만 기다리며 50분 수업 내내 스마트폰 알림을 신경쓴다. 뇌의 백그라운드에서는 끊임없이 관계의 앱이 돌아가고 있으니, 전면에서 수학 공식이 입력될 리가 없다. 배터리는 그렇게 방전된다.
어른도 마찬가지다. 공부를 시작하겠다면 먼저 관계부터 쳐내야 한다. 오늘 저녁 약속을 거절하지 못한다면, 오늘 밤 읽어야 할 30페이지는 영원히 못 읽을 것이다. 잔인하게 들릴지 모른다. 하지만 학습은 집중력이란 제한된 자원을 배분하는 냉혹한 경제 활동이다. 쓰레기를 처리하느라 에너지를 다 써버리면 당신을 성장시킬 에너지는 남지 않는다. 바운더리를 긋는 건 이기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내 학습 효율을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공리(Axiom)다.
“내 학습의 정의역에 ‘나의 몰입을 방해하는 자’는 포함하지 않는다.”
이 원칙을 세우고 문을 닫아거는 용기. 그것이 성적을 올리고, 지적 수준을 높이는 첫 단추다.
[정보의 정의역 : 뇌는 쓰레기통이 아니다]
관계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시급하게 통제해야 할 입력값이 있다. 바로 ‘정보(Information)’다. 현대인의 뇌는 비만 상태다. 정보가 없어서 무식한 게 아니다. 너무 많은 저질 정보가 입력되어 소화 불량에 걸렸다. 아침부터 연예인의 가십, 자극적인 뉴스, 15초짜리 숏폼 영상들이 뇌로 쏟아져 들어온다. =영양가는 없는데 칼로리만 높은 지적 정크푸드. 문제는 뇌가 이것들을 처리하느라 포도당을 다 써버린다는 점이다.
정작 깊이 있는 사색을 하거나, 어려운 전공 서적을 읽거나, 복잡한 업무를 해결해야 할 때 쓸 에너지가 없다. 글도 잘 안 읽히고, 집중도 안되고. 당연하다. 당신의 뇌는 이미 오전에 본 숏폼 영상 100개를 처리하느라 번아웃 되었으니까. 헬스장에서 근육을 만드는 사람은 식단을 철저히 제한한다. 근성장에 도움이 안 되는 불량식품은 입에 대지 않는다. 그런데 왜 뇌를 구성하는 재료인 지식은 아무거나 주워 먹는가. 쓰레기를 넣으면 쓰레기가 나온다(Garbage In, Garbage Out). 이것은 컴퓨터 공학의 원칙이자 학습의 원칙이라 할 수 있다.
뇌를 고립시키자. 학습을 위해선 정보도 단식이 필요하다. 스마트폰을 끄자. 연결을 끊고, 오직 양질의 단백질인 고밀도의 텍스트와 당신의 사고력 근육 만 남게 하자. 처음에는 불안할 것이다. 도파민 금단 현상이 온다. 하지만 그 심심함을 견뎌야 한다. 적막 속에서 비로소 뇌는 ‘수동적 정보 처리 모드’에서 ‘능동적 학습 모드’로 전환된다. 그때서야 비로소 남의 생각이 아니라 내 생각을 하기 시작한다.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스쿼트를 할 때, 무거운 바벨을 짊어지려면 발의 보폭(스탠스)을 단단히 잡아야 한다. 그래야 흔들리지 않고 일어날 수 있다. 정의역을 설정한다는 것은 바로 학습을 위한 삶의 스탠스(Stance)를 잡는 일이다.
“나는 공부에 방해되는 관계는 잠시 보류하겠다.”
“나는 뇌를 흐리는 정보는 차단하겠다.”
이 기준이 명확할수록 당신의 학습 밀도는 높아진다.
누군가는 “공부 좀 한다고 유세 떤다”, “사회성 없다”라고 비난할지도 모른다. 상관없다. 그 비난조차 당신의 정의역 밖에서 들려오는 소음일 뿐. 학습자는 결과로 증명하는 사람이지, 태도로 사랑받는 사람이 아니다.
진정한 자유는 무한한 접속에서 오지 않는다. 엄격한 차단 안에서, 내가 원하는 지식에 온전히 몰입할 때 느껴지는 지적 해방감. 거기서 온다. 그게 진짜 학습자가 누릴 수 있는 자유다. 이제 펜을 들자. 그리고 당신의 인생 함수 앞에 괄호를 열고 적어라.
{x| x는 내 학습에 도움이 되는 것들에 한한다.}
이 조건문이 붙는 순간, 당신의 지루하고 정체되었던 성장의 그래프는 비로소 우상향을 그리기 시작할 것이다. 문을 닫자. 그리고 집중하고. 이제야 비로소, 책을 펼칠 준비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