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해가 병신년(丙申年)이라는 것이 주목받기 시작한 작년 연말부터, "병신년"과 관련된 유머들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다. 소소하게는 "그래 봤자, 병신년."이라는 자조 섞인 개그에서부터, 권력자에 대한 비판을 이 단어와 연결지은 해학까지, 종류도 참 다양했다. 누군가 무심코 "올해 왜 이렇게 운이 없지?"라고 묻는다면, 우리는 1년 내내 "병신년이니까."라는 위트 섞인 대답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육십갑자와 비속어의 이중적인 의미를 담은 이 유머들에, 처음에는 그냥 피식 웃고 지나갔다. 하지만 이런 패턴의 유머들이 계속되면서 나는 상당한 문제의식과 함께 불편함을 느낀다.
학부 2학년 때, 나는 신입생 맞이를 책임지는 새맞이짱이었고, 과반 공동체의 생활문화를 고민하는 부서의 부원이었다. 이때, 1년 후배로 휠체어 장애인 친구가 입학을 하여 우리 공동체에 함께하게 되었다. 이 친구와 함께 신입생 환영회를 하고, 새터에 가고, 수업을 듣고, 같이 놀고 생활하기 위해 지금껏 해보지 못한 고민들을 하게 되었다. 나는 그 전까지 계단을 올라가는 것에 대해서 단 한 번도 어떤 '생각'이라는 것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저 다리가 좀 아픈 날에는, 걸어 올라가기 힘들다는 투정 정도. 그런데 그 친구에게는 고작 세 개의 계단으로 인해서 그곳이 '들어갈 수 없는 곳'이 된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체험하였다. 내 삶에서 아무렇지 않게 지나쳤던 것들이, 누군가의 당연한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나 자신이 많이 깨진 시간이었다.
그 이후로 내가 사용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세 개의 단어가 있다.
(장애인에 반대되는 의미로서의)'정상인', '애자', 그리고 '병신'.
'장애인과 정상인'이라는 프레임은, 당연하게도 장애인을 '비정상'으로 만든다. 언제나 '정상' 이데올로기 속에는 엄청난 권력과 배제가 작용한다. 그래서 '정상인'이라는 단어가 아니라 '비장애인'이라는 단어를 쓴다. 이 마저도 엄밀히 따지면, 사회가 정해놓은 '장애'의 기준에 따라가는 것이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우리는 누구나 장애를 가지고 있다. 나는 안경에 의지하지 않으면, 1m 앞에 글씨도 못 읽지 않는가. 하지만 시력이 나쁜 사람은 장애인이라고 하지 않는다. '장애인'으로 등록하고 분류하는 기준은 지극히 사회적이고, 가변적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어쨌든 인권을 논함에 있어서는 어떠한 '집단'을 칭해야 하기 때문에, 장애인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그 외의 사람들을 '비장애인'이라고 칭하는 것에 동의하는 것이다.
한 때 '애자'라는 단어가 유행한 적이 있었다. '장애자'에서 앞 글자를 생략한 것으로, 누군가를 직접적으로 장애인에 빗대어 비하하는 욕설이다. 내가 중고등학교 때 많이 쓰이던 비속어인데, 지금은 많이 쓰진 않는 것으로 알고 있다. 어쟀든 절대 써서는 안 되는 단어이다. (간혹 해외 축구 댓글에서 특정 팀 팬들을 비하하는 용어로 등장하곤 하는데, 쓰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병신'이라는 단어. '병이 있는 신체'라는 의미로 역시나 누군가를 비하할 때 쓰는 단어이다. 여러 가지 욕 중에서 상당히 빈번하게 쓰이는 단어이고, 나 욕을 할 땐 나도 모르게 이 단어가 튀어나오곤 한다. 어쨌든 이 단어가 장애인들에 대한 편견과 비하를 굳게 만드는 효과를 내기 때문에 쓰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하고, 노력하고 있다.
여기에 더해서 병신'년'이다. 모든 욕을 더 심하게 만드는 방법이 있다. 바로 욕 뒤에 '~년'을 붙이는 것이다. 남자를 대상으로 할 경우에만 그렇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데, 실제로는 남녀를 불문하고 '~년'은 '~놈'보다 더 심한 욕으로 인식된다. 이건 두말할 필요도 없다. 여성을 비하하는 의미이다.
단적으로 대통령의 이름에 이 단어를 붙이는 것은, 단지 권력에 대한 비판뿐만 아니고, 그 속에 대통령의 성별을 저열하게 끄집어내서 더욱 비하시키는 작용을 하고 있다.
정말 '~년(年)'과 우연히 음이 같았을 뿐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지금 이 유머가 확대 재생산되는 양상이나, 유머의 맥락을 보면 결코 그렇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이런 말을 하면 누군가는 "당신, 페미니스트인가?"라고 물을 것이다.
아니다. 나는 페미니스트가 아니다.
페미니즘에 반대해서가 아니고, 나 자신이 너무나 가부장적이라는 사실을 잘 알기에 '감히' 스스로에게 '페미니스트'라는 호칭을 붙일 수가 없다.
나 자신을 표현한다면 고작 '나 스스로가 가부장적이라는 사실을 아는 남성' 정도가 되겠다.
그렇다면 갑자기 나는 왜 이런 글을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 매거진에 쓰는가?!
그것은, 이러한 고민들이 바로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왜 매우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내가 페미니즘에 대해서 깊이 고민하게 된 계기는, 학부 때 짝사랑했던 친구가 페미니스트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똑똑하고 당당했지만, 또한 지극히 예민하고 감수성이 풍부했다.
그녀의 질문은 언제나 나를 당황하게 만들었고, 그녀의 글은 항상 내 마음을 뒤흔들다가 마침내 뒤집어엎곤 했다. 그녀는 너무나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나는 그녀와 한마디라도 더 나누기 위해서, 그녀를 조금이라도 이해하기 위해서, 그렇게 페미니즘을 알아가기 시작했다.
비록 그녀와 사귀지는 못했지만,
덕분에 나 자신의 가부장적인 모습에 대해서 성찰하고, 여성들의 권리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고민들을 지금까지도 이어 오고 있다.
내가 무슨 대단한 활동을 한다는 것이 아니다.
단지 이성애자 남성으로서,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더 깊이 관계 맺고, 더 평등하게 사랑할 수 있는 방식으로서 페미니즘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러니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주제임에 분명하다.
지금 이 글을 통해 '병신년' 유머를 사용한 사람들을 비난하고, 그 들이 반 인권적이라거나 마초적이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그 단어가 우리 사회와 삶 속에서 어떠한 효과를 드러내는지 조금만 더 민감하게 살펴보았으면 한다. 그리고 그것이 바람직하지 않다면, 스스로 더 좋은 방향으로 실천할 수 있기를 바란다.
나는, 불편하다. 그 유머들이.
그 유머들이 사용되지 않았으면 좋겠고,
우리 세상이 장애와 성별에 차별받지 않고 조금 더 평등한 세상이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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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대상 출간, <서른의 연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