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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odrain Oct 14. 2016

과거는 우리를 잡는다.

이야기 열둘

이야기 열둘


그는 다정했다.

어깨로 떨어진 한 방울의 비에 나도 모르게 뱉은 '앗 차가워.' 한마디에 그는 정수리까지 비로 젖으면서도 괜찮다 했고 다섯 가지 메뉴 중에 뭐가 제일 좋으냐 물어보더니 결국 네 군데의 가게에 들러 네 가지 메뉴를 포장해오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때때로 이기적이었다.

자신의 일이 바쁘다며 60킬로 떨어진 자신의 동네로 나를 부르면서 당연한 듯 말했고, 미안한 내색이 없었으며, 교통체증에 걸려 3시간 걸려 도착한 그의 동네에서 나는 그의 일하는 모습만 봐야 했다.

그의 연락에는 잘 잤냐는 말 한마디 없이 자신의 상황과 어려움만 있었다. 그의 말들에는 나에 대한 궁금함은 전혀 없었다.


그래도 그는 여전히 로맨틱했다.

문득 손등에 입을 맞출 줄 아는 사람이었고,주변 눈치를 보며 포옥 안아줬으며, 반짝이는 한강대교를 보며 노래를 불러줬다.


나는 혼란스러웠다.

그의 일이 바쁜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며, 내가 먼저 가겠다고 했으니 미안해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미안해하지 않는 그의 모습에서, 내도록 일만 해야 하는데 나를 굳이 그날 그 먼길을 오라고 하는 그의 모습에서, 미리 설명하지 않았던 그의 무심함에서, 내 상황은 안중에도 없는 그의 연락에서,

난 과거에 만났던 남자의 모습을 봤다. 끝도 없는 이기적인 모습으로 결국 헤어지고 말았던........

그는 그 사람과는 다른 사람이고 섣부른 일반화는 하지 말자 백번을 다짐해도.

나는 의심스러웠다.  


과거의 연애가 내 발목을 잡고 있었다.


서로 이성의 어떤 모습이 싫은지에 대해 이야기했었다.

나는 예의 없는 모습이 싫다 했고 그는 밤늦게까지 '이태원에서' 노는 여자가 싫다고 했다.

공교롭게도 나는 그 주말에 친구와 이태원의 bar를 가기로 약속이 되어있었다.

그를 만나기 전에 한 약속이고 1년 전부터 같이 가보자고 얘기하다 바빠서 못 갔던 곳이었고 등등, 나는 그에게 충분한 설명을 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당일, 어디서 노는지, 어디로 이동하는지 뭘 하고 있는지 그에게 세세히 보고를 했다.

여자인 친구와 10시쯤 이태원의 bar에서 아주 도수가 낮은 칵테일 한잔을 마셨고, 음악을 듣다가 두시쯤 한강진의 조용한 맥주집으로 옮겨 맥주 500cc 한잔을 마시고 집에 돌아왔다. 이 모든 과정을 그에게 의심의 여지가 없는 증거사진과 함께 보고를 했다.

그는 내 연락에 답이 없었다.

그렇게 노는 여자 싫댔잖아.


그가 과거에 만났던 '이태원에서 바람났던 그녀'는 아직도 그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그는 그다음 날에도 나의 장황한 설명과 설득의 문자에 연락이 없었다.

그다음 날에도 연락이 없었다. 뭘 하고 있는지 정도의 단답은 있었지만 대화는 없었다.

이틀에 걸친 몇 번의 '얘기 좀 하자'는 내 말에 그는 답 한 번이 없더니 내가 한 전화에 '왜?'라는 말을 남겼다.

그는 이 과정에서 충분히 예의가 없었으며 이기적이었다. 그렇게 그와의 관계를 끝냈다.

그리고 과거의 경험상, 그는 내가 회식을 해도 싫어할 거고, 친구를 만나도 싫어할 것이며, 과거의 경험상, 그는 화가 나면 잠수를 탈 것이며, 나 혼자 애태우다 나 혼자 상처받을 것이다.

몇 시간이 지난 후, 그는 관계를 돌려보려 전화했지만 이미 우리는 서로의 벽을 보았다.


과거의 경험상.


아닐 수도 있다. 우리는 그런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

각자 약간의 잘못은 했지만 그 정도도 이해 못할 나이도 아니었고, 이해 못할 정도의 잘못도 아니었다.

그러나 우리의 경험들은 그를 그런 남자라고 단정 짓게 했고, 나를 그런 여자로 단정 짓게 했다.


과거의 경험은 대체로 상처로 남으며 그 상처들은 우리를 망설이고 보호하게 만든다.

상처는 딱지가 되어 앉았고

우리는 딱지와 흉터로 만들어진 성벽 안에서 과거라는  늪에 빠져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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