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나이 일곱 살 때 우리 집은 이사했다. 오락실에 딸린 작은 단칸방에서 방 두 개가 따로 있는 아파트로. 급작스럽게 이사한 이유는 연년생인 오빠에게 큰 사고가 있었기 때문이다. 오빠는 당시 유행했던 슈퍼맨 놀이를 하다가 옆 건물 옥상에서 떨어졌다. 다행히 건축자재 위로 떨어져 충격이 덜했지만 머리부터 떨어졌기 때문에 뇌진탕이 의심되는 상황이었다. 병원에선 하루가 지나기 전에 토한다면 뇌에 이상이 있을 수 있다고 했다.
사건이 일어나던 시간에 나는 방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다. 정신없이 나를 흔들어 깨우는 아빠와 함께 병원으로 갔다. 그때 엄마가 병실에서 나오며 말했다. “00 이가 토했어.” 엄마는 울고 있었다.
버스터미널 앞 가겟방은 아이들을 키우기에 적합한 환경은 아니었다. 부모님도 그 부분을 알고 계셨지만 조금이라도 돈을 더 모아 이사를 가자며 차일피일 미뤘다. 그 사고 이후로 우리는 아파트로 급하게 이사했다. 방 두 개에 부엌이 따로 있고 우리 가족만을 위한 화장실 겸 욕실이 있었다. 겨울에는 연탄을 쓰지 않아도 바닥이 뜨끈뜨끈했다. 단지 내에는 모래가 깔린 놀이터가 있었다.
문제는 오빠가 학교에 가고, 엄마 아빠는 일하러 가고 난 이후였다. 아무도 없는 집에 난 혼자 있어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전에 살던 동네와는 달리 아는 이가 없었다. 밖을 나가면 똑같이 생긴 건물들이 있을 뿐 어디가 어딘지도 알 수가 없었다. 너무 심심하고 외로웠다.
오빠가 집에 오면 놀 대상이 있어 좋았다. 한 살 터울이긴 했지만 그래도 오빠 아닌가. 오빠는 여덟 살 때 밥을 처음 지었다. 집에 밥이 없어 어떡하느냐는 전화에 엄마는 전화로 밥 하는 법을 오빠에게 설명해 주었다. 보고 따라 해도 힘들었을 텐데 전화로 듣고 밥을 짓는 일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우선 쌀을 씻어서 밥솥에 안쳤다. 취사버튼을 누르고 오빠와 나는 신나게 놀다 왔다. 집에 오면 밥이 되어 있겠지 하는 기대로 밥솥을 열었지만 웬일인지 밥은 생쌀 그대로였다. 물을 한 컵 넣고 취사 버튼을 다시 눌렀다. 그렇게 두어 번을 더 하고 우리는 밥을 먹을 수 있었다.
가장 자주 해 먹은 음식은 밥에 날계란과 간장을 넣어 비벼 먹는 계란밥이었다. 불을 이용해 조리를 안 해도 되고, 영양소와 맛이 어느 정도 충족되는 식사였다. 엄마가 찌개나 국을 큰 통에 한가득 해 놓으면 별 반찬이 없어도 몇 날 며칠이고 맛있게 먹었다. 집에서 반찬투정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몇 달 뒤 초등학교에 입학한 난 엉망인 학교생활을 했다. 입학하기 전에 한글을 겨우 떼고 가긴 했지만 학교공부는 나에게 너무 어려웠다. 받아쓰기 시험을 보면 빵점에서 몇십 점 정도로 낙제 수준이었다. 받아쓰기 시험은 왜 그렇게 자주 돌아오는지. 오전반 오후반을 헷갈려 잘못 등교하기도 했다.
어느 날은 틀린 단어를 스무 번씩 쓰고 담임선생님께 검사를 받은 후 하교해야 했다. 나는 스무 번이 얼마 큼인지 잘 알지 못했다. 큰 수 이겠거니 하고 틀린 단어를 여러 번 써서 교무실로 갔다. 내 공책을 살피던 선생님의 표정이 좋지 못했다. 선생님은 내 뺨을 여러 대 때리셨다. 덜 쓴 숫자만큼이었을까? 조용한 교무실에선 찰싹하는 소리만 들렸다. 굴욕적인 기분. 그 상황이 꿈같았다. 교무실 문 밖에는 같이 검사를 받으러 간 친구가 기다리고 있었다. 맞는 와중에도 친구가 이 소리를 들으면 어쩌나 걱정이 됐다.
하루는 친구 생일 초대를 받았다. “0월 0일 (화) 오후 3시 000동 000호.” 생일 초대를 받다니 기뻤다. 엄마에게 얘기해 생일선물도 미리 준비하고 포장까지 마친 후 친구네 집으로 향했다. 띵동. 초인종을 눌렀을 때. 친구 엄마가 나오셨다.
“네가 00이니? 오늘 생일 아닌데 오늘인 줄 알았구나. 선물은 고마워. ”
친구엄마는 선물만 가지고 다시 문을 닫았다. 닫히는 문틈사이로 몇몇 친구들이 집안에서 놀고 있는 게 보였다. 생일은 아니지만 친구들을 초대해 놀고 있는 건가. 이상했지만 친구엄마가 아니라고 한 이상 어쩔 도리가 없었다. 집으로 터벅터벅 돌아갔다.
다시 바른 생일날짜를 알려줄 거라 기대했지만 그 뒤로 다시 생일이야기는 없었다. 학교에서 맨날 혼나는 낙제생이기에 나랑 놀기 싫은 걸까? 자존감은 점점 낮아 갔다.
내 인생에 빛이 들어온 건, 큰 이모네 맏딸인 친척언니가 우리 집에 살게 되면서부터였다. 우울한 초등학교(당시는 국민학교) 일 학년을 마치고 이학년이 되던 시기였다. 언니는 수원에 있는 대학에 다녔는데 통학을 하기 위해서 우리 집에서 몇 년 동안 같이 살게 되었다. 언니는 나와 오빠의 공부도 봐주고 밥도 챙겨주었다. 언니가 온 이후로 나는 완전 다른 학교 생활을 하게 된다. 이학년 기말고사에서 올백을 맞았다. 먹는 것 입는 것 등 생활이 많이 안정되고 낮은 공부 자존감이 올라갔다.
부족하고 모자란 낙제생에서 우등생이 되자. 내 삶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친구들이 나를 대하는 태도도 달라졌다. 나도 친구들을 대할 때 부끄러운 마음을 떨쳐 버릴 수 있었다.
오빠의 낙하 사건으로 인해 급하게 진행된 이사는 경제적인 전환점도 됐다. 그 아파트를 시발점으로 부모님은 부동산 가치가 얼마나 빠르게 오르는지를 체감했다. 1980년대 후반은 빠르게 부동산의 가치가 오르던 시기였다. 부모님은 더욱 혼신의 힘을 다해 밤낮없이 일하며 돈을 버셨고 몇 년 만에 방이 세 개 딸린 삼십 평대 아파트로 이사했다. 빈곤층에서 중산층으로 역전하는 순간이었다.
무엇보다 언니와 함께 살 수 있어서 더 좋았다. 이사하지 않고 계속 가게 단칸방에서 살았다면 언니와 같이 살지도 못했을 거다. 돈을 버느냐 여념이 없는 엄마 아빠 밑에서 학교 생활과 일상은 계속 엉망이었을 것이다. 언니가 우리 집에서 몇 년을 살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난 지금과 많이 다른 삶을 살고 있었을 것 같다.
새옹지마가 된 그날의 사고가 미안하지만 정말 감사하다. 사고 당일 몇 번의 토를 하며 주변을 애타게 했지만 천만다행으로 오빠 머리에 이상은 없었다. 안 좋은 일로 급하게 진행된 이사였지만 내 삶은 그렇게 전환점을 맞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