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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그린 May 19. 2023

빈곤 속 행복

나의 유년시절

내가 태어나던 해, 우리 집은 부도가 났다. 원래도 잘 살지 못했지만 그로 인해 집은 더 어려워졌다. 그래서 아기시절 사진이 한 장도 없다. 먹고사는 게 바빠서 사진 찍을 여유가 없었다고 했다. 다른 데서 데려온 딸이 아니냐며 의심해 볼만한 일이지만 난 아빠와 똑 닮은 외모를 가지고 있다. 어딜 가도 아빠 닮았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 심지어 부녀 지간인 걸 모르고 따로 본 사람도 너는 참 아빠를 닮았구나 하고 이야기했다.


나에겐 한 살 터울 오빠가 하나 있는데 오빠에겐 화려한 백일, 돌 사진이 남아 있다. 우량아 대회에 나가라는 이야기를 들을 만큼 살도 오동통하게 올랐다고 했다. 남아선호사상이 있던 시기였다. 특히 부모님은 아들에 대한 애정이 컸다. 오빠는 작명소에서 이름을 지어주고, 내 이름은 엄마가 옥편을 보고 지었다고 한다. 부모님은 오빠 학교 육성회장을 할 정도로 학교도 열심히 찾았지만, 내 학교에는 한 번도 오지 않으셨다. 사진이 남아 있지 않은 이유는 어려운 살림과 더불어 내가 딸이란 이유도 있지 않았을까 의심이 되는 부분이다.


그래도 아빠는 자기를 똑 닮은 나를 무척 사랑했다. 내가 돌이 막 넘었을 무렵, 너무나 사는 게 힘들어 서울 큰 이모 댁에 나를 키워달라고 맡겼다. 아빠는 하루가 멀다고 나를 보러 찾아갔다. 맡긴 지 일주일도 안된 어느 날 아빠는 나를 두고 올 수가 없어 그냥 나를 품에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왔을 때 나를 안으려던 엄마에게 나는 고개를 홱 돌리며 가지 않았다. 생생한 이 장면. 꿈을 꾼 걸까. 아니면 어린 나에게 그 일주일은 충격이었고 나를 보러 오지 않은 엄마를 원망했던 걸까.


우리 집은 수원역 근처 버스터미널 앞에서 오락실을 했다. 가게에 딸린 작은 단칸방에서 네 식구가 생활했다. 화장실은 여러 가게 사람들이 함께 쓰는 한 칸짜리 변소였다. 실내에 따로 씻는 곳이 없어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밖에서 오빠와 목욕을 했다.


방은 넷이 누우면 꽉 차는 크기였다. 방에는 작은 싱크대, 옷장, TV가 있었다. 내가 제일 작았기 때문에 싱크대 앞 작은 공간은 내 자리였다. 싱크대 밑은 막혀 있지 않았다. 바퀴벌레나 다리가 많이 달린 벌레가 자주 나오는 방이라 그 어둡고 습한 싱크대 밑을 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집 근처에는 윤락 거리가 있었다. 그 거리를 뛰어다니며 고무줄놀이도 하고 놀았는데 여기서 놀지 말라며 쫓겨나기도 했다. 왜 빨간 조명 아래서 예쁘게 꾸민 언니들이 지나가는 남자들을 끌고 가게에 들어 가는지 아무도 이야기해 주지 않았다.


밤이 되면 길거리에 들어서는 포장마차에서 업소언니가 사주는 닭 발을 종종 얻어먹었다. 처음에 어떻게 얻어먹게 된 건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어린아이가 매운 닭 발을 먹는다며 재미있어하던 언니의 모습은 싱그러웠다.


엄마는 오락실에 앉아 지폐를 동전으로 교환해 주는 일을 했다. 백 원짜리 하나를 얻어 근처 슈퍼마켓에 가서 아이스크림을 자주 사 먹었다. 슈퍼에 가면 주인아줌마가 나를 보고 항상 아침이 왔구나 하고 반겨 주었다. 아침 일찍부터 슈퍼에 가서 아침이 인 줄 알았는데 어렸던 내가 아이스크림을 아침이라고 말하는 게 귀여워서 아침이었다.


사업수완이 좋은 부모님은 오락실을 운영하며 꽤 돈을 많이 버셨다. 돈을 버는데 총력을 기울였기에 아이를 돌보는 데는 많이 무관심하셨다. 나는 머리에 자주 이가 있었고 겨울이 되면 손이 터서 피가 나고 딱지가 앉았다. 수두 같은 전염병도 내가 제일 먼저 걸려 동네 아이들에게 전염시키고 네 살 때 오빠를 따라 놀러 갔다가 교통사고를 당해 팔이 금이 가기도 했다.


그런 환경에서 크는 게 얼마나 불행했을까 싶지만 나는 그 시절이 오히려 행복했다. 공터에서 채집하던 곤충과 식물들은 너무나 신기하고 재미있는 장난감이었다. 장사에 방해된다고 쫓겨나긴 했지만, 여기저기 장소를 옮겨가며 하던 고무줄놀이와 잡기 놀이는 하루 종일 실컷 했다. 조금 먼 거리에 있던 방방이(트램펄린) 타는 곳을 뛰어가며 느꼈던 희열도 기억난다. 가다가 넘어져서 무릎에 피가 나도 즐거웠다. 가는 길에 있던 보신탕 집 노란 강아지들과 친구가 되어 그 개들이 나보다 덩치가 커졌을 때도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달고나 뽑기는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지만 달달한 달고나 한입은 세상을 달콤하게 했다.  

  

하루 종일 열심히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놀다가 집에 가면 항상 엄마가 있었다. 엄마 무릎에 앉아 엄마가 불러주는 노래를 들었다. 엄마가 쓰담쓰담해주는 손길이 좋았다. 이렇게 예쁜 딸이 어디서 태어났냐며 내 작은 코를 살짝 치는 그 순간도 행복했다. 아파도 일 미터 거리 안에 엄마가 항상 있었고 엄마를 부르면 방에 난 작은 창으로 엄마가 얼굴을 내밀며 쳐다봤다. 가난하고 열악한 환경이었지만 항상 엄마가 있었다. 나에게 세상에서 제일 예쁘고 상냥한 엄마가.

 

돌이켜 보면 그 시절 우리 가족은 참 가난했고, 주변 환경은 열악했다. 하지만 주변 친구들이 사는 환경도 비슷해 가난하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다. 오히려 소꿉장난감은 내가 가장 풍족했다. 무엇보다 집에 돌아가면 엄마가 항상 있었다. 이것저것 많이 해주지 않아도 엄마가 있다는 자체가 행복했고 편안했다. 잠자리는 불편했지만 함께 자는 그 공간은 너무나 따뜻하고 포근했다. 수원 버스터미널 앞 오락실은 꿈에도 자주 나온다. 나에게 그립고 소중한 어린 시절이 거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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