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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그린 May 23. 2023

어두울 때, 더 낮은 곳에서 널 응원해

바닥신호등처럼

늦은 밤이다. 아들을 데리러 가는 길. 학원 가기 전 숙제 때문에 화를 낸 게 계속 마음에 걸린다.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리며 핸드폰을 보고 있노라니 바닥에서 초록불이 일렬로 환하게 켜진다. 낮에는 밝아서 바닥에 신호등이 있는 줄 알아차리지 못했다. 밤에 보니 바닥에 있는 불이 생경하다. 언제 이런 게 생긴 걸까?


바닥신호등 모습 (출처 : 남양주시)


밤에 만난 바닥 신호등은 친절하고 다정했다. 바닥에서 일렬로 켜진 불빛들을 건너며 걸을 때는 환호받는 느낌마저 들었다. 세상이 밝고 환해지는 느낌이다. 문득 울며 학원에 간 아들 생각이 스쳐갔다. 아들에게 화를 냈던 내 모습도. 이 바닥 신호등 같은 엄마가 되어 주었더라면 어땠을까. 온몸으로 “잠시 다른 데를 보아도, 실수해도 괜찮아. 내가 너의 편이 되어줄게! 너의 발 밑바닥에서 내가 너를 응원하고 있어. 그래. 잘했어. 이제 가면 돼.”라고 아들에게 말해주는.




결혼 후 2년이 지나 첫째 아들 림을 낳았다. 예정일 딱 맞춰 태어난 아이는 건강했고 잘생겼다. 볼 때마다 내가 이 아이를 낳았다는 자부심이 넘쳤다. 아이는 크면서 영특한 모습을 많이 보였다. 자동차 책과 공룡 책을 보고 또 보고 잘 때도 책을 안고 잤다. 아이는 두 돌이 되기 전부터 숫자를 줄줄 셌으며, 네 돌이 되기 전에 한글을 읽었다.

“림은 정말 천재는 아니어도 수재는 될 거야.”

남편은 흐뭇하게 림을 바라보았고, 친구들 모임에서도 우리 아이는 똑똑하다며 진지하게 이야기하여 낯부끄럽게 했다.


아이가 어릴 땐 자유롭게 키우고 싶었다. 사교육 한번 시키지 않고 많이 노는 게 최고의 교육인 것처럼 놀이터에서 놀게 했다. 집에 와서도 흔한 학습지 한 장 풀리지 않았다. 사실 내면에는 내 아이는 그렇게 하지 않아도 잘할 거야 라는 믿음이 있었다.


첫째가 일 학년 겨울방학이 시작되던 무렵, 둘째를 낳고 일 년 육아휴직을 했다. 아들에게 잔소리를 하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였다. 이제 2학년이 되었으니 슬슬 공부를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두 자릿수 덧뺄셈 연산 책을 사서 아이에게 한 장씩 풀라고 시켰다. 수학천재인 줄 알았던 아이는 푸는 속도도 더디었고, 풀릴 때마다 심하게 짜증을 냈다. 나중에는 스스로 문제집을 찢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그렇게 많은 양도 아닌데 왜 이러는 건지 한 장에서 한 페이지로 줄였지만 비슷한 상황. 결국 우리의 첫 공부는 그렇게 중단되었다.


스스로 한글과 숫자, 덧뺄셈을 깨우친 아이였다. 그래서 따로 공부를 가르친 적이 없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알 수 없었다. 아이는 학교 공부에도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당황스럽고 아이가 이해 가지 않았다.

"학교 가야지. 어서 일어나, 왜 못 일어나니, 밥 빨리 먹어라, 또 지각하겠어 어서 가라, 글씨는 이게 뭐니, 앉을 때는 허리를 똑바로 하고 앉아, 손톱 좀 그만 물어라…."

아이에게 아침부터 저녁까지 잔소리가 이어졌다.

 

아들이 3학년 되던 해, 코로나로 학교를 가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나는 회사에 양해를 구해 재택근무를 하고, 단축근무를 하기도 했다. 아이는 게시판을 통해 수업을 배우고 과제를 받았으나 원활하게 학교과제를 수행하지 못했다. 아이에게 심한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줌 수업으로 전환된 수업에서 컴퓨터로 유튜브를 몰래 본다는 걸을 알게 됐다. 거실로 나와 소리를 켜고 수업을 받으라고 했다. 컴퓨터 다루는 게 능숙한 아이였다. 갈수록 아이를 의심하고 그렇게 살아서 나중에 뭐가 되려고 그러냐는 말도 자주 했다. 공부를 하지 않으면 인생이 얼마나 힘겨운지를 계속 이야기하고 네가 그렇게 살 수도 있다며 아이에게 협박을 계속했다. 아이의 눈에는 분노가 어려있었다.

 

어느 날 본 아이의 뒷모습은 초라했다. 마치 앙상한 나무처럼 생명력이 다해 쪼그라들어가는 느낌이었다. 워낙 마른 아이기도 했지만 계속 야단만 맞았던 탓일까. 총명하던 아이의 눈빛이 퀭해진 듯했다. 하지만 아이가 잘못했을 때 바로 다그쳐 혼내야 아이가 바르게 자란다고 생각했다. 아이가 위축되는 건 내 잘못은 아니라고 스스로 되뇌었다.


처음 가는 논술학원에서 아이에게 설문지를 작성하게 했다. 자기의 장단점을 쓰는 칸이 있었는데, 아이는 장점에 아무것도 쓰지 못했다. 충격이었다. 잘생기고 총명하고 착한 내 아들이 본인에 대한 장점을 단 한 개도 쓰지 못하다니. 그동안 내가 아이에게 한 말과 행동들이 잘못 됐음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막 초등학교에 입학한 상태에서 어린 동생이 태어나고 그로 인해 엄마 아빠의 사랑과 관심도 분산됐을 터. 그 상황에서 쏟아진 잔소리와 비난은 아이를 자꾸 작아지게 했다.




나는 불친절한 신호등 같은 존재였다. “똑바로 앞을 봐. 정신 차리지 않으면 넌 신호를 놓치고 너의 인생은 답답해질 거야. 내가 장담해. 다른 아무것도 보지 말고 앞만 보렴. 실수하면 안 돼!”라고 말하는. 아이의 실수는 고쳐지지 않았고 불안은 커져만 갔다.


바닥 신호등은 내가 아들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 알려줬다. 밝을 때보다 어두울 때 더 환하게 빛을 내는 신호등처럼. 높은 곳이 아닌 보다 더 낮은 곳에서 나아가기를 기다리고 응원하는 신호등처럼. 잠시 한눈을 팔아도, 쉬고 있어도 괜찮다고 너를 안심시켜 주는 그런 바닥 신호등 같은 엄마가 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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