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이네 철판요리 1부 (Sik's Teppanyaki)
#6 다섯 번째 이야기, 오클랜드로 고고씽!
by goodthings May 24. 2023
2월 22일 이후로 한동안 그 무엇도 할 수 없었다.
얼마 후 쇼핑몰이 다시 오픈을 해서 먹거리를 사러 갔다.
산입에 거미줄은 칠 수 없으니…
그곳에서 사람들의 얼굴을 보면 그전에 생동감 있는 웃는 표정의 얼굴들은 그 어디서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지상 마지막의 낙원인 뉴질랜드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로 손꼽히는 이곳에 왜 이런 일이?
모든 것이 , 다 잘못된 것이었다.
그 후로도 계속된 여진이 있어서, 나를 뺀 나머지 세 식구, 아내, 아들, 딸은 한국으로 갔다.
아직 반학기가 더 남아있어서 같이 따라갈 수 없었다.
학교가 언제 다시 정상화될지는 몰라도, 수업이 재개된다는 소식이 들리면 가야 되는 상황이었다.
여진이 계속 오는 상황 속에서 나는 크라이스트처치에 남아있었다.
그런데 어떤 공포감이라도, 연속과 반복이 일상화된다면 그냥 또 왔네.
왔구나. 그런 정도일 것이다.
나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때로는 여진이 있어서 중심 잡기 어렵더라도 그전처럼 겁먹지는 않았다.
이렇게 시간이 흘러서 졸업할 시간이 다가왔다.
다행히도 지진 이후에 일터를 잃은 사람들에게는 어느 정도 정부에서 지원이 있었다.
넉넉하지는 않지만, 생활은 충분히 가능했던 돈이었던 것 같다.
나의 직업이 그때는 학생이었기 때문에, 학생수당을 받았는데 이제는 졸업을 해서 그런 명분이 사라졌다.
철판요리를 어느 정도 배웠는데, 일을 찾으려 하여도 마땅한 일자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30대의 나이에 “직업을 찾을 능력이 없어.”라고 약자 코스프레하면서
실업수당을 받고 싶은 생각은 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때 집에서 15분 정도 운전하고 가면 크라이스트처치공항인데 ,
그곳에 일자리가 있는 것을 뉴질랜드 판 구인, 구직란에서 볼 수 있었다.
일단, 여기저기 이력서를 내보자고 마음먹고, 공항과 몇몇 다른 곳에도 지원을 했다.
며칠 후에 인터뷰를 하자고 공항에서 연락이 왔는데, 사람 느낌이라는 것이
헤드셰프와 매니저, 그리고 나, 셋이서 인터뷰를 하는데 서로의 첫인상들이 너무 좋았었다.
인터뷰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는데, 헤드셰프 Antony 가 다음 주에 보자고 했다.
“See you soon, chef.”
공항 직원 출입증(신분증)다음 주 월요일이 되자, 연락이 와서 공항에서 이태리 음식, 카페음식 을 하면서 열심히 일했다.
국내선 탑승전, 때로는 국외선 탑승전 사람들을 상대로 음식을 만들어서 제공했었다.
공항 내에 food service 관련은 내가 일하고 있는 한 업체에서 모두 관할하고 있었다.
때로는 뭔가 특권이라 할까. 사람들은 줄 서서 세관 통과 하고,
엑스레이 탐지기 거쳐서 어렵게 어렵게 지나가야 하는 곳을 나는 자유자재로 왔다 갔다 할 수 있었다.
그렇게 공항에서 8개월 정도 지났을 때 어느 날, 철판요리일을 같이 일했던 준에게 연락이 왔다.
“식이형, 그동안 잘 지내셨죠?”
“응. 오랜만이다. 너는 어떻게 지냈어? 안 그래도 궁금했는데.”
“저는 지금 오클랜드에 와있어요.”
“그래. 전화번호도 너 바뀌었어? 요즘 어떻게 지내? “
“네. 전화 지진 때 가게 안에서 못 가지고 나왔어요.
전 ***호텔직영 ***테판야끼에서 일하고 있어요. “
“잘됐네. 거기 5성급 호텔 아니야? 맞지!”
“네. 뉴질랜드에 1개. 호주에는 10개 이상 있는 유명한 호텔이라네요. “
“잘됐다. 조건도 좋겠네. “
“맞아요. 형. 페이도 그전과 비교하면 장난이니예요. 일강도는 훨씬 덜하고요. 요리만 하면 돼요”
“좋겠다. 한국에 부모님들도 좋아하시겠네. “
“네. 형. 부모님이 차도 사주셨어요. 아들 호텔에 취업했다고요. 하하..
다름이 아니라 지금 자리가 하나 비어서 그런데 형 일해 보실래요.”
“어. 그래. “
"올리비형이 일하다가 다시 크라이스트처치로 내려가셨어요. 그런데 총주방장이 올리버형 같은
많은 경력자 아니고, 저 정도만 할 수 있는 사람이면 채용하겠다 하네요."
"그랬구나. 올리버 씨가 오클랜드에 갔었나 보네."
“네. 형. 그런데, 일단 인터뷰를 보셔야 할 거예요. 제가 이메일로 자료 보내드릴게요.”
“고마워. 읽어 보고 지원해 볼게. “
“형. 곧 뵈면 좋겠어요. “
“그래. 형이 곧 연락할게.”
이렇게 전화통화를 마치고, 집에 오자마자 이력서, 자기소개서를 나름대로 잘 정리해서 호텔 측에 보냈다.
3일쯤 지났나, 연락이 왔다. 인터뷰를 하자는 것이었다.
나의 괜찮은 시간 때를 묻고 이틀뒤, 그 당시 2012년 초에 주로 사용하던
영상통화 가능한 앱인 Skype로 인터뷰가 진행됐다.
인터뷰 중에 나의 사랑스러운 딸 아이린이 쑥 하고 들어왔다.
문을 잠근다는 걸 깜빡했다. 머리에 땀이 어찌나 났는지, 지금 생각해 보아도
인터뷰를 진행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황당했을 것 같다.
서로의 대화가 거의 끝나갈 때, 총주방장이 너 언제부터 일 가능해?라고 묻는 것이었다.
됐구나! 하고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3주 노티스는 주어야 한다고 하니,
See you after 3 weeks.
Yes. Chef. Thank you. Thank you.
인터뷰가 끝난 뒤에 기쁨도 있었지만, 또 이별에 대한 준비도 해야 했다.
공항 식구들에게 어찌나 미안한지, 그래도 퇴직서를 그날 바로 써 내려갔다.
다음날 아침에 담당자에게 퇴직 의사를 말하니, 급여가 적어서 그래?부터 시작하여서
같이 남으면 좋을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해왔다.
미안한 감정이 크지만, 철판요리일을 계속하고 싶었는데 마침 일자리가 생겼다고 이야기하니,
Good luck and keep in touch with you.라는 말과 함께
3주 동안 후임에게 일을 잘 알려줄 것을 부탁했다.
당연히 떠날 때도 언제 다시 만날지 모르니, 관계에 있어서는 좋게 유지하는 것이 가장 좋다.
항상 그래왔다.
지구는 둥그니, 돌고 돌아서 안 볼 것 같은 사람을 결정적인 순간에 다시 만나는 것이 "인생사"이니.
이제 오클랜드행이다.
3주 후에.
아내와 이야기를 하고, 일단 나부터 먼저 떠나기로 했다.
인생에서 계획대로 못하고 생각에만 머물며, 시간만 허비하는 것은
앞길이 막혀 있다고 스스로 판단하고 돌아서는 것 때문이다.
방법은 “뛰어넘거나 부딪쳐서 부숴버리거나.’
때로는 그 높이가 아주 낮을 수도 있고, 그 두께가 아주 얇을 수도 있다.
해 보기 전엔 아무것도 모른다.
故 정주영 회장님의 명언이 떠오른다.
“해보기나 했어?”
이제 남섬을 떠나 북섬으로 그것도 5성급 호텔주방장으로 …
고고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