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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 Wave May 30. 2021

(80년대생 성장기) 취업 준비

라떼도 취업은 어려웠다

왜 하필 지금… 본격적인 취업난

글을 쓰고 있는 나는 80년대 중반생이고 2010년부터 지금의 회사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만으로 직장생활 10년이 지난 지금, 초등학교 6년, 대학교 6년의 재학기간을 생각하면 회사는 내 생에 가장 오래 ‘유지’하고 있는 조직인 셈이다.


요즘도 그렇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구직자들의 '탈 백수'는 점점 힘들어지고 있으며, 사실 80년대생인 우리가 취업을 준비하던 때에도 취업시장은 일종의 고시라고 불릴 만큼 치열했다.


신입사원 시절 어느 회식자리에서 50대 부장님이 취업 관련 무용담을 늘어놓았던 기억이 난다.

“우리 때는 말이야 사기업은 골라서 갔어. 한 번은 내 친구놈이 새벽까지 술을 마시다 갑자기 집에 간다 길래 뭔 일이냐 물었더니 “조금 있다 삼성 면접 가야 돼” 라고 말하더라고. 그리고 가더니 덜컥 합격하지 뭐야 허허허..”. (실제로 지금도 일부 부장님들의 언행을 보면, 그 시절은 기업 전반에 인사 검증 시스템이 취약했구나 라고 느낄 때가 다).

하지만 우리가 취업을 준비하던 시기에는 그런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 얘기는 이미 흘러간 지 오래다.

자리가 한정된 상황에서 기성세대가 반영구적으로 자리를 차지하는 사이, 80년대생인 우리가 갈 수 있는 자리는 조금씩 사라져 갔다. 특히 `98년 IMF와 `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한국 사회를 휩쓸고 간 뒤 한국 기업들의 채용 절대규모는 급속도로 줄어들었다.


여기는 어디지? 일단 넣고 보자

지금도 비슷하지만 취업난이 본격화된 시절, 80년생 취준생들은 공채 시즌 수십 군데의 기업에 입사지원서를 제출했다. 기업들이 정해진 기간에 한정된 채용절차를 진행하는 상황에서, 가능하면 많은 기업에 ‘묻지마 지원’하여 서류라도 통과하는 게 1차적인 목표였던 것이다.

실제로 `11년 어느 채용사이트 조사에 따르면 취준생의 절반에 가까운 47.8%가 묻지마 지원을 해봤다고 답했으며, 대졸 취준생 10명 중 7명은 본인의 스펙이 채용공고에 충족되지 않는 요건인데도 지원해 본 적이 있다고 답했다. 그만큼 취업이 간절했던 것이다.


대학 졸업을 앞두고 먹고살 궁리를 하던 나는 일찍부터 취업전선으로 눈을 돌렸다. 그리고 다른 취준생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 공채시즌에 50군데가 넘는 기업에 지원했다.

입사지원서 신청 전에는 당시에 유행하던 ‘표준적인 기본 스펙’(학점 3.5 이상, 금융3종, 토익 900언저리, 토스 level7 등)을 완성해야 했으며, 서류 광탈을 면하기 위해 기업마다 요구하는 자기소개서 작성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여기에 더해 남들이 다 한다고 하는 정체불명의 취업스터디도 참석하고(보통 이성 간 만남의 장으로 변질다), 10학점이 넘는 전공 수업까지 들으니 짧은 기간이지만 1년여의 준비 기간이 정말 순삭 됐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많이들 경험했겠지만 취업을 준비하며 내가 그렇게 다방면에 관심이 많은 사람인지 처음 알게 되었다. 현대자동차를 지원할 때 나는 어릴 때부터 슈마허에 열광한 자동차 광이었으며, 삼성을 지원할 때는 태어나기 전부터 삼성을 보며 꿈을 키워온 삼성빠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방콕(집돌이)을 가장 좋아하는 내가 자기소개서 안에서는 타고난 모험가였으며, 온갖 역경을 극복하고 살아온 히어로로 돌변했다.

마지막에는 정말 다중인격장애가 심히 의심되는 상황이었다.


피할 수 없는데 즐길 수도 없다 -‘서류 광탈!’

당시에도 취준생들은 공채 시즌 정말 다양한 서류 광탈을 경험했다. 아무도 설명해주지 않으니 광탈의 구체적인 이유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잔인하게도 수많은 기업이 우리에게 유감 아닌 유감을 통보했다.

[귀하와 같은 인재와 함께할 수 없음을 유감으로 생각하며… 귀하와의 인연을 소중히 생각하며.. 회사 사정상 함께 할 수 없음을 아쉽게 생각...]


당신은 인재가 맞긴 한데 우리가 뽑을 만큼의 인재는 아니라니 지금 생각하면 놀리는 것 같기도 하다. 아니 놀리는 게 분명하다.

매년 쇼미더머니(Show Me The Money)를 보며 열광하다가도, 프로듀서들이 지원자들에게 “당신은 우리와 함께 갈 수 없습니다”를 외칠 때면 나도 모르게 “어엇” 하는 탄식과 왠지 모를 숙연함을 느끼는 것은 그때의 트라우마가 남아있어서 인지도 모르겠다.


나 역시 무수히 많은 서류 광탈을 경험했다. 지원했던 50군데의 기업 중 서류합격에 통과한 곳은 단 5군데였고, 1차 면접을 치르고 나니 나에겐 결국 2장의 카드만 남게 되었다.


마지막 스퍼트!

최종면접은 보통 5배수 내외로 선별되므로 나는 2개 기업에 5대1의 경쟁률을 남겨두게 되었다. 한 군데는 취준생 사이 호도가 높던 대기업으로 입사 전부터 우선순위가 높은 곳이었고, 다른 한 곳은 말 그대로 묻지마 지원했던 IT 전문기업이었다.

면접이 일주일 정도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나는 결국 처음부터 관심 있던  지금의 회사에 올인하기로 결정했다. 짧은 시간 안에 두 군데를 동시에 노리자니 이도 저도 안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결정을 내린 후에는 다른 지원자들과의 차별화 방안을 고심했다. 지원자들의 스펙이 비슷할 것으로 예상되는 상황에서, 나를 돋보이게 할 만한 무기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 조금 무식한 방법을 선택했다. 면접을 위해서는 생생한 현장 감각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나는 무턱대고 수도권 소재 사업장 5군데를 방문했다. 그리고 현재 면접을 준비하는 상황임을 밝히고 인터뷰를 요청하자 당황스러웠을 텐데도 소장님들이 반갑게 맞이해 주셨던 기억이 난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주말에는 지방에 있는 회사의 생산 공장을 방문해 생산 현장의 상황을 탐색하는 노력도 병행했다(보안상 아쉽게도 공장 출입은 금지당했고, 대신 경비 아저씨와 깊은 대화를 나눴다)

2차 면접은 임원진들 여러 명과 지원자 한 명으로 진행되는 다 대 일 방식이었고 면접은 예상대로 평이하게 진행되었다. 1차 면접이 실무 면접이라면 2차 면접은 조금 더 포괄적인 개인의 가치관과 관련된 질문이 많았기 때문에 대답을 못할 질문은 거의 없었다.


다만 너무 평이해서 결과가 쉽지 않겠다고 속으로 생각하던 그때 드디어 내가 기다리던 순간이 왔다.

CHO(인사 총괄 임원) 曰 “마지막으로 할 말 없어요?” 그렇다 나는 그 순간만을 노리고 면접장을 들어갔다 (리서치에 따르면 구직자들의 65%가 마지막 말이 채용 당락에 영향을 미친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나도 마찬가지 생각이었다). CHO의 말과 동시에 나는 준비된 시나리오를 시작했다. “사실은 보여 드릴 게 있습니다. 제가 명함을 하나 만들어 왔습니다”(지금은 오그라들 수 있으나 당시에는 임원진들이 흥미롭게 지켜봤다) 나는 면접 전 지원회사 로고와 나의 이름을 박은 명함을 따로 준비했는데, 그 명함을 보자 CHO의 반응이 나쁘지 않았다 “줘 봐요. 안보여 줬으면 어쩔뻔했어. (건네 줌) 근데 이거 우리회사 명함 디자인이랑 다른데??(씨익)”


합격 맛집! 부대찌개

명함을 건넨 이후 나는 준비 과정에서 대리점과 공장을 다녀온 현장의 얘기를 덧붙이며 진정성을 어필하고자 노력했다. 결과적으로 나는 희망했던 회사에 최종 합격할 수 있었다. 지금도 학교 앞에서 부대찌개를 먹다가 합격문자를 받고 소리 지르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리고 지금, 그렇게 좋아 마지않던 회사에서 10년째 근무하고 있다. 달라진 게 있다면 이제는 부대찌개를 그때만큼 좋아하지 않는다는 점 정도다...


여기서 나의 입사 과정을 조금은 장황하게 설명한 이유 첫 번째는, 80년대생 직장인들도 취준생 시절 나름 심각한 취업난을 겪었던 세대임을 설명하기 위함이다. 외환위기 이후 급속도로 좁아진 취업 문 탓에 취준생 시절 대부분의 80년생들은 많은 고통과 노력을 감내해야 했으며, 각자 남들에게는 다 얘기하지 못한 사연들을 하나쯤은 가지고 있다. 그나마 개인적으로는 운이 좋았던 편이고 당시에도 취업 장수생들이 많았다. 다음으로 두 번째 이유는 이처럼 넘치는 열정으로 힘든 취업과정을 이겨냈던 우리 80년대생들이 사회생활을 겪으며 어떻게 조금씩 보수화(꼰대화) 되었는지 찬찬히 설명하기 위함이다.


 고통스러운 취준 기간을 가까스로 이겨낸 뒤, 우리는 회사에 들어가면 지금까지의 노력을 다 보상받을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리고 자소서에 쓴 것처럼 막연하게나마 회사에서 나의 역량을 발휘하며 인정받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우리들 앞에는 꽃길이 놓여 있는 줄 알았다. 하지만 사회생활의 첫 발은 그다지 녹록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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