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과 치유의 글쓰기 02
18세기 중반, 1762년, 유럽에서 모차르트가 첫 연주여행을 다니던 해, 우리나라에선 한 남자가 뒤주 속에 갇혀 굶어죽었다. 사도세자. 그의 아내는 혜경궁 홍씨, 그의 아들은 정조다.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은 인생 말년에 이르러 <한중록>이라는 에세이를 썼다. <한중록>의 ‘한’은 한가할 한(閑), 한할 한(恨), 두 가지로 전하며, 다른 이름 <읍혈록(泣血錄)>으로도 불린다. <한중록>은 한글본과 한문본이 다 있으며 이후에 나온 필사본도 열 편이 훌쩍 넘는다. 그런데, 혜경궁은 자신의 지난 기억을 되살려 쓴 에세이를 한 번이 아니라 총 네 번 썼다. 마지막 네 번째 버전이 집필된 때는, 아들 정조가 죽은 뒤 5년 지난 때(1805년)다.
흥미롭게도, 전무후무한 일대사건 사도세자의 죽음에 관한 혜경궁의 기억은, 네 번째 <한중록>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자세히 읽을 수 있다. 그보다 앞선 <한중록>들에서는, 그 기억의 무게와 충격에 비해, 비교적 간략히 지나가는 편이다.
과거 기억을 쓸 때 우리는 중요한 것부터 순차적으로 쓸까? 꼭 그렇지는 않은 듯하다. 다시 혜경궁의 경우를 보자. 첫 번째 <한중록>에는 어린 시절과 입궁 이후의 기억들이 적혀있다고 한다. 이후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를 쓰면서 혜경궁은 자신의 ‘더 중요한 기억’ 안으로 차츰차츰 더 파고들어간다.
글쓰는 일이 거듭될수록 혜경궁은 자신의 지난 삶, 동일한 삶의 기간 동안 경험한 기억들을 정돈해나간다. 집필의 ‘동기’와 ‘의도’를 뚜렷이 벼리면서. 그 과정에서, 더 중요한 기억을 과감히 다룰 수 있게 되었다. 그녀는 아들의 사후 자신의 입지를 보호하고자 자신의 기억을 해석, 재해석한다. 혜경궁은, 사도세자의 사망사건 목격자, 그리고 연루자(친정아버지) 가문의 일원으로서 옹호 혹은 항변하는 내용을 명확히 추가해나간다.
기억을 쓰는 것은 과거 기억을 그저 단순재생하는 게 아니다. 쓰고자 하는 어떤 기억에 멈춰서서 그 기억에 관련되어 자신 안에서 역동하는 ‘마음의 작용’을 충분히 응시할 때 과거 기억을 쓸 수 있다. 기억을 쓰는 이는, 쓰고자 하는 그 기억의 내용이 무슨 의미인지 자기대로 해석하여, 이른바 ‘말이 되게 만드는 과정’을 필연적으로 거치게 된다. 이는, 실제 삶의 경험과 자신의 기억이 현재 자신의 인생관과 모순되지 않도록 조절하며 재해석하는 과정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아! 일부러 과거를 미화 혹은 비하한다는 게 아니다. 자기 삶의 일관성과 자기 인생에 대한 자신의 관점(입장)을 글쓰기 작업 속에서 유지, 보전하는 수준의 정리정돈을 단행하는 것이니.
혜경궁도 그리 하였다. 1권에서부터 2, 3권을 거쳐 4권에 이르는 동안 그녀는 자기 마음의 움직임에 점점 더 충실해져간 듯하다. 그런데 그녀의 기억 쓰기는 혼자 하는 고독한 집필작업이어서 한계가 있었다. 그녀의 집필작업이 고독할수록 집필의도는 자기중심으로 견고해졌다. 네 번째 <한중록>은 당시의 왕 순조에게 헌정하는 정치적 탄원과 심리적 호소, 자기와 자기 가문에 대한 변론의 성격을 띠고 있다.
홀로 글을 쓰는 것은, 함께 글을 쓰는 것과는 아주 많이 다른 일이다. ‘기억과 치유의 글쓰기’는 함께 글을 쓰는 작업이다. 여기서 함께 글쓴다는 것은 공동집필을 뜻하지 않는다. 나의 기억을 내 자유의지에 근거하여 쓰되 여러 사람 앞에서 발표함(소리내어 읽음)으로써 내 글이 지목하는 과거 기억에 대하여 객관화하는 과정을 밟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내 기억 안에 놓여있는 그 경험을 내가 왜 그렇게 느꼈는지, 과거의 그 사건을 내가 왜 그런 방식으로 되새기는지, 그 사람을 내가 왜 그런 감정 위에서 떠올리는지, 돌이켜 생각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치유가 일어날 수 있다. 글을 쓰고 발표하는 전체과정 속에서, 자기도 모르게 그리고 예기치 않았던, 미세한 변화의 바람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 변화의 바람이 곧 치유의 바람이다.
기억과 치유의 글쓰기가 혜경궁 홍씨의 글쓰기와 같은 듯 다른 지점이 여기에 있다 하겠다. <한중록>을 네 번 쓰는 동안 자신의 기억을 열심히 다룬, 고독했던 혜경궁이 한 일을 우리는 혼자 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우리의 해석과 재해석, 곧 변화의 바람은 혜경궁의 그것보다 어쩌면 조금 더 공정할 수 있는 방향으로 불게 된다. 조금 더 진실할 수 있게 된다.
고독한 주관적 현실 너머에 ‘진실한(real)’ 현실이 있다. 우리는 기억과 치유의 글쓰기를 통해, 과거 기억으로부터 조금 거리를 두는 연습을 하고자 한다. 진실한 현실에 가닿기 위하여···. 과거 기억 속의 ‘나’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하여···. 그 이해 위에서 현재의 ‘나’를 건강하게 세우기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