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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인미 Dec 23. 2020

경미한 여성혐오자와 심각한 여성혐오자의 심리적 거리

코로나19 팬데믹 와중에 사망한 연쇄살인범 이야기 <더 리퍼>

여성만 살해함


지난 11월 13일(현지 시각), 영국의 한 연쇄살인범이 코로나19 팬데믹 와중에 병원에서 사망했다는 기사가 BBC 웹사이트에 올라왔다.


https://www.bbc.com/news/uk-england-54874713


그는 코로나19 치료를 거부했다.


1975년부터 1980년까지 그가 살해한 사람 숫자는 모두 13명이며, 모두 여성이었다. 이뿐 아니다. 살인미수 사건만 해도 최소 7건이다. 그러니까, 공식 신고된 사건으로 도합 20명 이상의 여성들이 그의 공격을 받았었던 것이다. 그는 오직 여성만을 골라 공격했다.  


그의 살인이 연속될 당시, 영국 경찰과 언론은 그를 ‘리퍼(Ripper)’로 불렀다. 요크셔 지방에 거주하며 활동(?)했기 때문에 일명 ‘요크셔 리퍼’였는데, 미제사건으로 남아있는 1880년대 살인마 ‘잭 더 리퍼(Jack the Ripper)’를 떠올리게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요크셔 리퍼의 본명은 피터 섯클리프(Peter Sutcliffe)다.  


섯클리프를 다룬 다큐멘터리가 넷플릭스에 공개되어있다. 각각 50분 안팎의 상영시간을 지닌 네 편의 다큐멘터리로 구성되어있으며, 제목은 <더 리퍼(The Ripper)>.


섯클리프에게 살해당한 열두 명 희생자들


섯클리프에게 살해당한 첫 번째 피해자, 윌마 매캔





편견이 오류를 키움


<더 리퍼>가 지적하듯, 연쇄살인사건 수사 지휘본부는 살인사건 수사 초기에 연쇄살인범이 성매매여성들만 골라 살해한다고 짐작했다. 그런 다음 그 짐작을 곧바로 기정사실로 굳혔다.


그런데 피해자를 성매매여성으로 지목한 것은 오류의 시작이었다. 그게 왜 오류의 시작이었냐면, 살인범의 공격에서 천만다행으로 살아남은 여성들의 제보가 수사 초기에 있었는데 제보자가 ‘성매매여성이 아닐 경우’ 대번에 무시되었기 때문이다. 죽을 뻔했던 기억을 가까스로 되살려 제보했던 몇몇 여성들은 무기력하게 돌아서야만 했다.


시작된 오류를 붙잡고 있느라 엉망진창인 수사 지휘본부에 어느 날 범인의 편지와 녹음테이프를 주장하는 우편물이 배달되었다. 한 수사관은 편지의 내용을 면밀히 분석한 결과, 1880년대 ‘잭 더 리퍼’를 다룬 책의 문장을 거의 그대로 베낀 점, 실제 사건정황과 몇 가지 어긋나는 점을 확인하였다. 그래서 그는 그 편지가 진짜 범인이 보낸 게 아닐 수 있다는 보고서를 제출했다. 그 보고서는 바로 묵살됐다. 성매매여성을 혐오하는 편지 속 거만한 말투가 연쇄살인범스러웠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녹음테이프 관련해서는 더 한심한 사태가 일어났다. 진위 여부를 꼼꼼히 살피지도 않은 채 녹음된 목소리의 억양을 분석해서, 범인의 출신지와 거주지를 추론하였다. 그 추론이 언론에 발표된 이후, 제보자는 반드시 이런 질문을 받게 되었다. “억양이 그쪽 사람이야?”


나중에 밝혀졌지만 편지와 녹음테이프를 만들어 보낸 사람은 섯클리프가 아니었다. (이 사람은 도대체 무슨 정신으로 그런 짓을 했는지 알려지지 않았다.) 수사는 방해를 제대로 받았지만, 섯클리프는 별 방해를 받지 않고 묵묵히 살인을 계속했다. 그가 그러는 동안, 수사 지휘본부는 여성들에게 밤 늦게 다니지 말도록 당부하거나 강요했다.





거듭된 오류가 범인 체포를 지연시킴


그러나! 마침내 섯클리프는 검거됐다. 수사 지휘본부가 개과천선해서 갑자기 수사를 잘해서? 아니다. 경찰관 한 명이 순찰 도중, 수상한 차를 발견했다. 차량조회를 해보니 문제가 있어 보였다. 경찰관은 우선 그를 차량절도 혐의로 경찰서로 보냈다. 그런 다음, 뭔가 찜찜해서 그 차가 서있던 곳으로 되돌아갔다. 그곳에서 그는 살인흉기들을 찾아냈다.


연쇄살인범 섯클리프가 잡히기까지 수사 지휘본부는 아무것도 한 게 없다. 그들은 여성들의 제보를 무시했고, 기본적 자료들을 오판했으며, 5년간 섯클리프를 아홉 번 조사했음에도 그를 용의자로 특정하지 못했다. 그가 멀쩡해 보이는 남자였기 때문에···?


사건이 연속적으로 일어나는 5년 동안 수사 지휘본부는 여성들에게 ‘밤 늦게 다니지 말라’고 경고하는 데에만 초집중했다. 밤 늦게 다니면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 또, 가능한 한 남성과 동행하라고 조언했다. 그 바람에, 여성들에게 함부로 다가가 집에 데려다주겠다고 추근대는 남성들이 이전보다 더 많아졌다.  





오류의 첫 걸음에서 여성혐오를 발견함  


섯클리프가 체포된 이후, 수사 초기에 제보자로 나섰던 여성들을 포함해 몇몇 사람들은, 수사 오류의 시초에 무엇이 있었는지 명확히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은 수사 지휘본부 집단에서 여성혐오(misogyny)를 발견할 수 있었다.


수사 지휘본부가 언론에 발표한 기사에서 어떤 피해자의 성매매 이력은 부정적으로 부풀려졌고, 어떤 피해자의 평소 품행은 근거없이 폄하되었다. 수사 지휘본부는 여자들이 처신을 잘하면 죽지 않을 거라는 식의, 얄궂게 비틀린 여성혐오를 수시로 발설했다.


한편 연쇄살인마 섯클리프는 여성혐오가 심한 사람이었다. 폭력적인 아버지에게 허구한날 폭행당하는 어머니를 보며 자란 소년의 마음에서 여성 이미지는 어느덧 ‘당하는 존재’에서 ‘당해도 싼 존재’로 변화해갔다. 심지어 섯클리프는 신(God)이 자신에게 성매매여성들을 제거할 것을 명령했다고 진술했다. 신이 그런 명령을 내렸을 리 만무하다. 더구나 그는 성매매여성이 아닌 여성들도 죽였다.





여성혐오자들 사이에 숨을 때 안전한 여성혐오 범죄자들


어떤 여성이 야한 옷차림, 진한 화장, 춤추는 걸 즐기고 술도 좀 마시며 친구들과 어울려 놀기 좋아하는데, 밤 늦게 돌아다니다 변을 당했다면, 그 여성은 ‘죽을 짓’을 한 걸까? 만일 남성이 위와 같이 행동했다면 그 남성도 죽을 짓을 한 걸까?


범죄의 피해자가 된 여성을 볼 때 자기도 모르게 일종의 여성혐오에 기반한 질문을 품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경미한 여성혐오는 경미한 남성혐오만큼이나 광범위해 보인다. 사실 남성혐오, 여성혐오 모두 문제다. 모든 혐오는 악하다.


물론 모든 여성혐오자들이 여성혐오 범죄를 저지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여성혐오자 비율과 강도가 높은 사회는, 여성혐오 범죄자들에게 의도치 않게 숨을 곳을 제공할 가능성이 높다. 비슷비슷한 생각과 감성을 지닌 사람들 사이에 있으면 누구나 안전감을 느낀다. 혹시 강력범죄를 저지른 여성혐오 범죄자라 할지라도 여성혐오자들 사이에 있으면 의심받지 않을 수 있다.  


섯클리프가 엉터리 수사관들에게 붙잡히지 않고 재범, 삼범을 지나 마침내 십삼범까지 갈 수 있었던 까닭은, 여성들을 일제히 통행금지시키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그때 당시 수사 지휘본부가 여성혐오자들 사이에 숨어있는 여성혐오 범죄자 하나(섯클리프)를 골라낼 안목을 적합하게 갖추고 있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다큐멘터리는 그들도 경미한 여성혐오를 갖고 있었음을 차근차근 입증해나간다.


모쪼록 <더 리퍼>를 시청하는 동안, 끝없이 한숨이 나올지라도, 이게 40여 년 전 영국이란 사실을 매순간 상기하길 바란다. 2020년엔 어느 나라도 여성혐오 범죄를 이런 식으로 수사하지는 않으리라는 소망을 품기 위해서···.  





*오마이뉴스에도 게재되었습니다. 제목은 오마이뉴스 편집부가 수정하기 전 제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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