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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인미 Jun 06. 2022

구씨 단상

<나의 해방일지>, 판타지와 현실과 콤플렉스 사이를 부지런히 오가다

로맨틱 판타지 


주위에서 "구씨"라는 용어(?)가 하도 많이 들리기에 처음엔 뭔 소린가 싶었다. 유사 발음 Gucci?? 아니었다. 어떤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나의 해방일지>라는 드라마의 남자 주인공.


시험삼아 1화를 클릭하고 보기 시작했다. 재미없으면 어차피 그냥 중단해도 될 테니까, 하는 가벼운 마음! 그런데, 드디어 구씨가 등장하자 '계속 관람'에 대하여 긍정적인 쪽으로 내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를 포함해 어떤 여성들의 심리 안에 깃들어있는 '나쁜 남자에 대한 로맨틱 판타지'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께름칙하긴 했다. 께름칙하긴 해도 그게 사실이니 정직하게 인정할 수밖에 없지만.


나는 구씨를 보며 로맨틱 판타지에 사로잡혔다고 털어놓아야겠다. 저 사람이 드라마 스토리 안에서 어떻게 전개될지 궁금했다. 아니나 다를까, 드라마가 진행될수록 귀여운 클리셰를 확인하게 되기도 했다. 구씨는 퉁명스러운 알콜중독자이며, 폭력과 친절을 아무렇지도 않게 넘나드는 해괴하고 비현실적인 인생을 살아가지만, 스스로 마음에 담게 된 여자(염미정/ 배우: 김지원)에게만큼은 지순할 뿐 아니라 솔직한, 꽤나 바람직한 (여성들이 연애상대자로 꿈꾸는) 캐릭터였다. 세상 모든 여성들까지는 아닐 수 있지만 대다수의 여성들이 원하는, 자신의 변화를 여자에게 확인시켜주는 방식으로 드러내는 남성상이랄 수 있다.



판타지 & 현실 & 콤플렉스


구씨를 연기한 배우 손석구는, 아마도 여성들이 대체로 인정할 것 같은데(남성들은 어떨지 모르겠다), 섹시한 매력을 한껏 풍긴다. 섹시한 여자든 섹시한 남자든, 섹시함의 근간은 '당당함'과 자기자신에 대한 '자존감'에 있다고 생각한다. 손석구의 연기는 손석구 자신의 성적 매력을 당당히 드러내는 방향으로 꾸준히 작동하도록, 본인이 꽤 의식적으로 추구하는 것 같아 보인다. 분명 작품마다 해당 캐릭터를 살리는 연기를 하긴 하나, 결정적으로 본인의 성적 매력(sexy)을 꾸준히 어필하는 쪽으로 전개해나간다고 말할 수 있다. 어떤 역할을 연기하든 자신의 음성, 얼굴 등 타고난 신체적, 성적 매력을 자기가 잘 알고 영리하게 잘 활용하는 것.  


자신의 신체적, 성적 매력을 스스로 알고 있는 사람들은 제법 많다. 비단 배우들뿐 아니라 배우 아닌 사람들 중에도 적지 않다. 그런데, 배우 아닌 사람들은 물론이거니와 배우들의 경우에도 자신의 성적 매력을 조금 안일하게 혹은 평이하게 표현하는 분들도 간간이 있다. 혹은 대충 상투적으로 표현하고 마는 이들도 없지 않다. 그런데, 손석구는 꽤 당당하고 독특하게 표현한다. 내가 이렇게 표현하면 당신들은 내 매력을 너끈히 알아볼 수 있을 거야, 이걸 못 알아볼 순 없어, 그리 속삭이는 듯하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 보면 모든 캐릭터에서 손석구가 보이고, 모든 캐릭터가 손석구 개인으로 수렴된다. 모든 캐릭터가 밋밋해진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의 캐릭터 위에 또 하나의 캐릭터를 얹어가며 통합하며 손석구 자신이 이미지를 조합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특별한 재능이 아닐 수 없다.


고백컨대 나는 쉰 살 넘은 여성으로서, 구씨를 보면서 나의 로맨틱 판타지가 자극되는 것을 느꼈다. 로맨틱 판타지는 어느 나이에 이르렀든 물론 가능하다. 하지만 나로 말하자면 꽤 오랫동안 현실감각, 현실파악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을 해온 사람이다. 이 나이 되도록 로맨틱 판타지가 실생활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단 걸 모를 수 없다. 따라서 <브리저튼1, 2>를 재미나게 보면서도, 에헤라, 저건 판타지야, 하는 마음으로 봤다. 금세 등장인물들과 그들의 사연에 거리를 둘 수 있었다.  



구원자 콤플렉스


구씨의 경우도, 내가 구씨 류의 사람을 만나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는 생각을 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손석구라는 배우에겐 아직 질리지 않았다. 잘생긴 배우는 어딘가 모르게 시간이 흐를수록 질리고, 나와 무관한 사람이니 질려도 상관없다는 경지(?)에 이르곤 하는데, 손석구라는 잘생긴 배우는 질리기까지 시간이 아마도 좀 더 지연될 것 같다. 이건 그의 매력일 수도 있고, 내가 목하 외롭기 때문일 수도 있다. 즉 판타지라는 것이 배우 쪽에 원인이 있을 수도 있고, 배우를 보는 관객 쪽에 원인이 있을 수도 있다는 거다.


돌이켜보면 나는 꼭 구씨 류의 사람은 아니었으되, 나쁜 남자 캐릭터에 반했던 적이 몇 번 있었고, 그런 남자와 어쩌다 엮여 연애를 해본 적도 있다. 그런데 분명히 하자. 현실에서는 나쁜 남자, 뒤끝이 좋지 않았다. 뒤끝뿐 아니라, 과정도 좋지 않았다. 내내 힘들었다. 나쁜 남자는 계속 나쁜 남자로 있었지, 변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아마도 내가 나쁜 남자를 구원(?)할 만한 여자가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 그런데, 세상에 나쁜 남자를 변화시키는 여자가 과연 존재할까? 그러고 보면, 나쁜 남자에 대한 로맨틱 판타지는, 남자를 "추앙하는 지점"에 있는 게 아니라, 여자가 여자 스스로를 "추앙하는 지점"과 관계가 더 깊은지도 모르겠다. 음, 여자들에게서 간혹 찾아볼 수 있는 구원자 콤플렉스??!! 스스로를 구원자로 상승시키는 콤플렉스 말이다.       


그리하여 나는 구원자가 될 수 없다는 것, 즉 진짜 나의 현실을 아직 깨닫기 전까지는, 최소한 구씨에 대한 로맨틱 판타지를 며칠 더 끌어가겠지 하는 예감이 든다. 어쩌면 뜻밖에 금방 끝날 수도~



(P.S.) 실제의 나는 염미정보다는 염기정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마음에 드는 남자한테 불쑥 다가갔다가, 저쪽이 나 무안하지 않게 배려하면서 "아, 죄송합니다"로 요약가능한 언행을 보이면 비로소 깨닫는, 그때까지 계속 눈치 없이 행동하는 여자 말이다. 그래서, 나는 염기정(배우: 이엘)에게서 잠깐이나마 치유받는 느낌을 받기도 했다. 요컨대 나 같은 여자가 또 있다는 사실에 치유받았다는 이야기. 아, 그러나 "아, 죄송합니다"를 내색한 남자와 결국 그녀가 연애하게 되자, 나의 치유는 시급히 도루묵이 되고 말았다.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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