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다운, 인간다운, 소통하는 책읽기
*강원도 인제군 박인환문학축제 ‘독서포럼’ 발제글입니다. 글이 길어서, 나누어 연재합니다. 감사합니다. 참고로, 이 글에서는 여성주의와 페미니즘 용어가 혼용됩니다. 단 여성주의와 페미니즘이 간단히 ‘여성중심’이나 ‘여권신장’ 등으로 이해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본문주는 연재글 마지막 편에 한꺼번에 올라갑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A. 어째서 인간은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소통해야 하는가?
적게는 둘, 많게는 14젠더에 속한 인간들은 모두 다 제각각 고유한 생각과 감정을 갖고 살아간다. 즉 동일하지 않다. 나와 당신(들)을 포함해 지금 지구상 79억 인구집단을 이루고 있는 허다한 인간들은, 이전에 살았던 인간 누구와도 동일하지 않고, 현재 동시대를 살고 있는 인간 누구와도 동일하지 않으며, 앞으로 이 지구에 도달해 살아갈 미래의 인간 누구와도 동일하지 않다. 혈액형으로 성격의 유사점을 분류해보기도 하고, 요즘 유행하는 MBTI 성격유형검사 같은 것을 통해 나와 비슷한 사람들과 다른 사람들을 반갑게 무리지어보기도 하지만, 사실상 사람들은 한 명 한 명이 다 고유하게 다르다. 이를 정치사상가 한나 아렌트는 ‘차이성’이라고 개념정의하였다. 그런데 인간은 그렇게 서로 다들 다르니까 다르다는 이유로 뿔뿔이 살아가지는가? 그렇지 않다. 세상 모든 인간들은 인간이라는 공통점을 동등하게 공유한다. 이를 아렌트는 ‘동등성’이라고 불렀다(Arendt, 1998). 요컨대 인간은 서로 ‘똑같지 않다’는 면에서 ‘똑같다.’ 차이성과 동등성이 소통의 토대요 기점이다. 동등성과 차이성 중 어느 한쪽이 더 중요하지도, 더 긴급하지도 않다.
불과 한두 세대 전까지만 해도 여성집단 내 몇몇 여성들은 자기가 인간이라는 사실을 (일일이 강조해 언급하지 않으면 인간으로 알아봐주지 않기 때문에) 강조해야만 했다. 예를 들어 1984년 이른바 ‘공순이’로 불리웠던 이순옥은 “비록 지하실 먼지 속에서 일을 하지만 우리 같은 근로자들도 똑같이 생각하고 생활하는 인간들”이니 “더럽다고, 가난하다고, 무식하다고 인간을 차별하지는 말았으면” 좋겠다고 통찰력 있게 주장했다(이순옥, 1984, 47). 또, <캄보디아 성노동자연합> 소속의 디나 찬이라는 성매매여성은 프놈펜에서 열린 ‘제1회 젠더와 발전 전국대회(1999년)’에서 다음과 같이 연설했다.
우리는 살과 뼈, 피부가 있고 심장이 있으며, (···)
우리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여자입니다. 존중과 품위로써 대우받고 싶습니다.
여러분이 누리는 권리를 우리도 가지고 싶습니다(젠슨, 2008, 307).
인간이 왜 소통하여야 하는지는 명백하다. 동등성과 차이성 때문이다. 소통하지 않으면 상대방과 나와의 차이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소통한다. 또, 동등하기 때문에 소통을 통해 서로 이해할 수 있음을 소망하며 우리는 소통활동에 뛰어든다.
B. 책읽기를 통한 소통은 어떤 소통인가?
모든 종류의 소통에서 관건은 ‘공통감각(Common Sense)’이다. 여기서 공통감각이란 ‘일반상식’이 아니다(Arendt, 2003, 139). 퀴즈 형식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일반상식은 공통감각의 의미와 다르다. 예컨대 도미니카공화국의 수도가 ‘산토 도밍고’라는 것을 빠르게 답할 수 있다고, 칸트가 뜻하는 공통감각을 갖춘 것으로 볼 수는 없다는 말이다.
칸트의 개념정의를 따르면 공통감각은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판단하는 것”이며(Arendt, 2002, 132), “우리의 감정을 일반적으로 소통가능하도록 만드는 판단의 기능”을 가리킨다(Arendt, 2002, 138). 칸트는 공통감각을 ‘음식 맛보기’에 연결하여 재미있게 설명했다. 사람들 앞에 굴 요리가 나왔다고 가정하자. 굴 맛을 내가 느끼는 것과 똑같이 타인이 그대로 느끼도록 할 수는 없지만(혀가 다르고, 입맛이 다르고, 음식취향도 다르다), 그 맛을 상상해볼 수 있게는 할 수 있다. 물론 소통이 원활히 이루어져 상대방이 굴 맛을 이해하게 되었다 해도 그 사람이 그 맛을 좋아하게 되었다고 확정해서는 안 된다. 그 사람이 그 맛을 좋아하게 되든 좋아하게 되지 않았든, 소통활동이 일어났을 뿐이다.
아렌트가 해석한 칸트 정치철학에 따르면, 공통감각에서 이기주의가 극복될 수 있다(Arendt, 2002, 131-132). 공통감각의 가치는 그것이 객관적ㆍ보편적인 것을 가리킨다는 데에 있지 않다. 공통감각은 사람들의 주체성이 동등하게 공존하는 상호주체적(intersubjective) 상황을 지향한다(Arendt, 2003, 141-142). 공통감각은 ‘상상하기’에서 발현된다. 상상한다는 것은 지금 눈앞에 없는 것, 실재하지 않는 것을 실재하는 듯 느끼는 것을 의미한다. 상상하기는 공동체 내의 다른 구성원들의 심정을 내 마음에 떠올리는 활동을 뜻한다(Arendt, 2003, 139). 그것은 공상도 아니고 망상도 아니며 백일몽도 아니다. 칸트는 이를 ‘확장된 심성(enlarged mentality)’으로 불렀다. 확장된 심성은 “주관적이고 사적인 조건들을 이겨내는 능력”을 표상한다(Arendt, 2011, 212). 사람들은 자기 경험에 바탕하여 생각을 하는데, 그 과정에서 끝없이 공통감각을 환기하는 상상활동을 감행한다.
책읽기는 공통감각을 기반으로 타인의 생각과 감정을 상상하는 활동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저자의 생각과 감정을 상상하는 책읽기는 훌륭한 소통훈련에 다름 아니다. 생각훈련이며(힐, 2022, 21), ‘확장된 심성’ 훈련이다. 책읽기는 다른 인생과제를 위해 간혹 사용될 수도 있겠지만, 역시 또다른 책읽기활동이나 소통활동 그 자체를 위해 활용될 수도 있다. 이 소통훈련이 어떤 한 사회에서 어떤 부류의 사람들에게 허락되지 않고 억압되어있다면 그것은 잘못된 일이다. 소통훈련은 동등성과 차이성을 지닌 모든 인간에게 (열네 젠더를 초월해) 고룻하게 적용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