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다운, 인간다운, 소통하는 책읽기
*강원도 인제군 박인환문학축제 ‘독서포럼’ 발제글입니다. 글이 길어서, 나누어 연재합니다. 감사합니다. 참고로, 이 글에서는 여성주의와 페미니즘 용어가 혼용됩니다. 단 여성주의와 페미니즘이 간단히 ‘여성중심’이나 ‘여권신장’ 등으로 이해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연재글 마지막 편입니다.
여성다움은 인간다운 것이다. (물론 남성다움도 인간다운 것이다.) 남성다움이 전쟁이나 돈벌이활동에 국한되면 안 되듯, 여성다움 또한 출산 및 육아활동에 국한되지 않는다. 남성다움에 책읽기가 포함된다면 여성다움에도 책읽기가 포함된다. 인간다운 활동 중에 소통활동만큼 인간다운 것은 다시 없다. 실존주의적 인식론을 정립한 의사이자 철학자인 칼 야스퍼스(Karl Jaspers)는 “진리는 소통하는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진리는 어디 하늘에서 완전하게 정제되어 뚝 떨어지는 게 아니라, 열네 젠더에 속한 인간들 사이 끊임없는 대화와 소통 속에서 형성 및 변형된다. 진리의 형성 및 변형이라는 말이 혹시 어색한가? 천동설에서 지동설로 진리가 변형된 것을 생각해보라.
요컨대 책읽기는 소통훈련으로서 가장 인간다운 활동 중 하나다. 인간 말고 책을 읽는 동물종은 없다. 다른 개체의 생각과 감정이 그야말로 ‘체계적으로 궁금한’ 동물종은 호모 사피엔스뿐일 것이다. 반응하거나 반사적으로 행동하는 차원을 넘어 스스로의 생각과 감정을 들여다보는 반성적 행동을 할 줄 아는 호모 사피엔스가 인간이다.
우리는 인간이라서 책을 읽는다. 여성이라서 빈번히 책을 읽는 것도 아니고, 남성이라서 다량으로 책을 읽는 것도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젠더 차이에 무관하게 (페미니즘 없이) 책을 읽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페미니즘과 함께해야 한다. 차별당하는 사회적 소수자들의 능동성과 주체성을 인식하고 격려하기 위해서, 또 텍스트에 들어있는 표현과 의도에서 차별적 내용들을 걸러내는 비판적 독서를 하기 위해서다. 여는말 첫 번째 질문에 대한 응답이 바로 그것이 되어야 한다. “페미니즘 없이, 페미니즘과 함께 책읽기.” 다음으로, 여는말 두 번째 질문에 대한 이 글의 응답은 책읽기가 다른 무엇을 위한 수단이나 방법이 가끔씩 되기도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그것 자체로 목적인 (생각하기 위하여 생각하는) ‘생각훈련’이라는 점이다. 책읽기에서 활성화되는 ‘생각’은 다른 어떤 ‘행동에 서비스를 제공하는 하인’이 아니다(Arendt, 1982, 84). 그것 자체로 삶의 목적이며 경험이다.
결론적으로, ‘여성주의 없이 여성주의와 함께’ 책을 읽는다는 것은 우리 사회에서 차별ㆍ배제당하는 사람들의 능동성과 주체성을 인식하고 긍정하는 ‘소통훈련에 들어서있다’는 의미가 된다. 그와 같은 소통훈련에 들어서있는 사람은 그 사람이 열네 젠더 중 어느 갈래에 속하든 정녕 ‘인간다운 인간’이며, 책읽기활동을 목적으로 받아들였다는 의미에서 ‘인간다운 인간’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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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2021년 6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