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과거로 돌려 보내는 페스티벌 무대 (1)
점심 산책길, 랜덤으로 틀어둔 유튜브 플레이리스트에서 익숙한 전주가 흘러나왔다. 벚꽃이 지고 초록 이파리들이 고층 빌딩을 조금씩 가리기 시작한 4월 중순에 어울리는 싱그럽고도 신비로운 곡, 김광진의 동경소녀였다. 마음 같아선 후렴구를 목 놓아 크게 부르고 싶었지만 그러기에 점심시간 내가 거니는 사거리는 사람이 너무나도 많았다. 애써 흥을 억누르며 속으로만 멜로디를 흥얼거렸다.
그와 동시에 동경소녀를 속 시원하게 떼창하던 어느 가을밤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맞다, 나 이 노래를 라이브로 들었었지! 날씨가 따뜻해지고 옷차림이 얇아지기 시작하니 요새는 어떤 음악을 들으면 그 노래를 온 몸으로 마주했던 어느 페스티벌의 순간으로 시간 이동을 한다. 기억력이 짧은 편임에도 인상 깊은 무대는 그날의 바람과 햇살, 온도, 공기의 무게까지 생생하게 떠오른다.
올해도 그런 순간이 찾아오기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지난 몇 년 간 페스티벌을 다니며 유난히 마음에서 오래 머물렀던 무대 몇 개를 아카이빙 해보려 한다. 그리고 오늘은, 아무래도 이 기획을 떠올리게 해준 주인공을 먼저 소개해야겠다.
23. 10. 21 그랜드 민트 페스티벌(GMF)
김광진 - 동경소녀
23년 그랜드 민트 페스티벌 인스타그램에 '더 클래식'이 올라왔을 때, 나를 비롯한 대부분의 페스티벌 애호가의 눈이 휘둥그레졌던 기억이 난다. 더 클래식이 그민페에 나온다고? 대부분 페스티벌은, (특히 민트페이퍼가 주관하는 페스티벌은) 한창 인기를 끌고 있는 밴드나 떠오르는 신인들로 라인업을 구성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당시 나는 페스티벌을 갈지 말지 고민을 하고 있었기에 더 클래식의 출연을 알리는 게시물은 결정을 내리는 데 도움을 주었다. 이건 가야지...!
어렸을 때부터 올드팝이나 8090 대중가요를 들려주었던 엄마의 영향인지 나이보다 한 세대 앞선 노래들도 최신 음악만큼 좋아하며 자랐다. 더 클래식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중에서도 동경소녀를 많이 좋아했다. 곡이 시작되는 순간 경쾌하게 흐르는 건반의 멜로디 때문일까, 신나면서도 센티멘탈한 후렴구 때문일까. 정확하게 설명하긴 어려워도 동경소녀는 오래오래 내 가슴을 때리는 유형의 곡이었다. 가수의 근황을 알아보는 정도까지의 애정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노래를 들을 때면 요새는 뭐 하고 지내실까, 드문드문 궁금하긴 했었다.
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한 가을밤, 머리카락을 쇄골까지 기른 김광진은 키보드 박용준과 함께 노들섬 수변 무대에 머쓱한 웃음과 함께 등장했다. 어색한 게 당연할 것이, 94년 데뷔 후 처음으로 출연하는 페스티벌이라고 했다. 이 영광스러운 순간에 함께하다니! 30년 경력 가수의 첫 페스티벌 데뷔를 함께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이미 내 마음은 한껏 부풀어 있었다.
가득한 인파에 어색해하기도 잠시, 김광진은 가냘프지만 어딘가 힘 있는 목소리로 돌계단에 앉아 있던 모든 이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공교롭게 첫 곡이 그토록 갈망하던 동경소녀였다. 나는 마치 이날을 기다려온 사람처럼 모든 가사를 막힘없이 크게 따라 불렀다. 오랜만이야! 정말 보고 싶었지만!
곧이어 분위기가 반전되며 '편지'가 흘러나왔다. 여기까지가 끝인가보오. 익숙하고도 애절한 첫 소절이 공간을 가득 채우는 순간, 김광진의 목소리를 제외하고 모든 세상이 음소거가 되어버린 듯 장내가 적막에 잠겼다. 몇 곡의 노래가 지나가고 '역시는 역시구나' 생각할 때쯤, 어디선가 엄청난 환호성이 들려왔다.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돌아보니 대여섯 명 정도 되는 남녀 무리가 커다란 현수막을 격하게 흔들고 있었다. 김광진은 그들을 발견하고 반갑고, 고맙다는 듯한 표정으로 웃어보였다. 나 역시 누군가를 20년 가까이 좋아하고 있는 덕후로써, 눈빛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그들이 누구의 목소리를 들으며 어떤 노래와 함께 90년대를 지나보냈을지.
가수는 팬들만 모인 공연장이 아닌, 자신을 모를지도 모르는 이들과 아주 잘 아는 이들이 뒤섞인 군중 속에서 오랜 노래를 계속해서 한 음 한 음 불러나갔다. 그 뒤를 이어 중년의 열정이 느껴지는 응원의 함성이 코러스처럼 울려퍼졌다. 엇박으로 부르는 노래 같기도 한 그 어설픈 소리가 희한하게 듣기 좋았다. 이날 공연의 피날레는 '마법의 성'이 장식했다. 모두가 익숙하게 멜로디를 따라 불렀고, 무대 주변으로는 비눗방울이 눈송이처럼 흩날렸다. 마법의 성은 반칙이지... 생각하면서도 나는 차오르는 눈물을 꾹꾹 눌러 삼켰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김광진은 한동안 음악활동을 쉬었다.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 23년 가을이라고 했다. 지인의 제안으로 오랜만에 대학로 소극장에서 공연을 올렸고, 생각보다 팬들이 많이 찾아와 용기내어 페스티벌에도 참가한 거라고 했다. 그제야 나는 그 큼직한 현수막을 들고 있던 이들의 눈빛을 보다 깊이 이해할 수 있었다. 동경소녀의 가사가 참으로 공교롭게 다가왔다. 오랜만이야, 정말 보고 싶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