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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수샘의 장이불재 May 07. 2024

수능특강도 '북메이트'가 필요하다

  <공부할 권리>에는 정여울 작가가 읽은 책에서 길어 올린 잔잔하면서 투명한 영감들이 진솔하게 서술되어 있다. 같은 책을 두 번 사서 읽은 경험에서 얻은 깨달음을 아래와 같이 신선하게 전한다. 


  똑같은 책을 산 적이 있습니다. 게다가 이렇게 좋은 책을 왜 아직도 안 샀단 말인가, 하며 잔뜩 흥분한 채, 막상 읽어 보니 몇 년 전에 사서 형광펜으로 밑줄까지 쭉쭉 그은 책이었습니다.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 심각한 건망증일까요. 생각해 보니 '책을 읽고 오직 마음속으로만 간직한 책들'은 기억 속에서 곧잘 지워져 버렸습니다. 반면 글을 쓰고 세미나를 하고 강의까지 한 책은 결코 잊히지 않습니다. 

  그저 조용한 '내면의 묵독'으로 그친 책들은 마음의 비상구로 은밀히 잠입한 후 어느새 마음의 뒷문으로 스르륵 빠져나가 버립니다. 책이 삶으로 깊숙이 스며들지 못한 것이지요. 


  이 부분을 읽고 나니 국어 시간에 만난 문학 작품을 그저 문제풀이를 위한 지문으로 대하며, 속성으로 읽고 지나치는 수업 장면이 생각났다. 마치 저마다 다른 질감과 맛을 지닌 참치의 속살을 자세히 보지 않고, 매뉴얼대로 해체하여 회를 뜨는 일식 요리사와 비슷한 상황이라고나 할까…

  수능을 준비하는 아이들은 정여울 작가처럼 '내면의 묵독'도 할 여유도 없이 다음 지문, 다른 문제를 향해 페이지를 넘기고 있다. 그런 과정이 몇 년동안 반복되면, 이미 배운 시를 수능에서 만나도 처음 접한 작품처럼 당황할 수 있다. 그래서 '수능특강 문학편'을 읽을 때도 '북메이트'가 필요하지 않을까? 


  이제 저는 책을 읽고 나서 반드시 주변 사람들에게 수다를 떨곤 합니다. 독서만 할 것이 아니라 책의 메시지를 함께 나누고 실천할 '북메이트'가 필요함을 깨닫기 시작한 것입니다.


  고3 수업 시간에 매시간 수다를 떨 수 없으니, 아이들의 삶과 연결할 수 있는 내용이 풍부한 작품 몇 개라도 골라서 '표현 활동'을 시도하고 있다. 지난주에 배운 이형기의 시 <낙화>를 가지고, 3개 중에 하나를 선택해서 표현하는 활동을 과제로 내줬다.

  제출하지 않아도 상관없는 순수한 선택활동이다. 나름대로 열심히 표현해서 보내준 아이의 작품은 따로 저장해놓았다가 교과세특에 반영하고, 개성있는 작품 몇 개를 골라서 수업 시간에 보여주면 작성한 학생들이 뿌듯해할 것 같다. 



  나도 모방시를 써봤는데, 요건 학생들의 작품을 소개하고 나서 나중에 단톡방에 올릴 생각이다. 모방시는, 산문이든, 그림이든 나름대로 표현활동에 참여한 학생들은 이 시의 어조와 표현, 주제 의식을 장기 기억 속에 저장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나중에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이란 구절을 떠올리며 이별을 이겨내도 좋고, 떠나는 뒷모습이 아름다운 사람이 되기 위해 고민하는 계기가 되어도 좋다. 

  당장 써먹을 수 있는 기법보다 오랜 시간 아이들의 마음속에 조용히 자리 잡아 필요할 때 꺼낼 수 있는 영감을 줄 수 있다면 기쁠 것 같다. 주머니 속에 넣어둔 것을 잊고 있다가, 차가운 눈보라를 만나 당황할 때 문득 생각나서 꺼내는 핫팩처럼 말이다. 


「낙화」 (모방시)

                         - 민수샘


찍어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찍는 이의

컴싸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지필고사 4일을 인내한

나의 컴싸가 흐려지고 있다.


문제지에 분분한 엑스……

오답이 알려주는 배움을 챙기며

지금은 전진해야 할 때,


무수한 학교 시험을 거쳐야

딸 수 있는 졸업이라는 

열매를 향하여

그래도 시험이 있어 청춘을 불태웠다는

아름다운 회상을 위하여


나의 컴싸는 꽃답게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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