깃발 아래에서 만난 사람

- 다시 만난 계엄 9 (연작시)

by 글쓰는 민수샘

깃발 아래에서 만난 사람


K를 다시 만난 건 백화점 1층이었다.

K는 동그란 눈으로 물었다.

이 근처에 사냐고, 아직도 그 직장에 다니냐고.

나는 온라인에서 산 운동화를 A/S 맡기러 왔다가

구경하는 중이라고 말하지 못했다.

근처에 누구 만나러 왔다가 들렀다고 했다.

K는 쇼핑백을 살랑살랑 흔들며 돌아섰고

나는 무릎이 튀어나온 운동복을 내려다보았다.


K와 나는 옆자리에 앉아 3년을 일했다.

나는 점심시간에 시집을 읽었고 K는 주식과 코인 공부를 했다.

퇴근 후에 나는 노조 모임에 갔고 K는 부동산 스터디에 갔다.

내가 아파트를 산 다음 해에 집값이 폭락했고

K는 그 해에 아파트 두 채를 팔았다고 자랑했다.


K가 직장을 옮기고 재테크 책을 냈다는 소문을 들었다.

나도 직장을 옮기고 에세이를 묶어 책을 냈다.

K는 다시 자기 계발서를 썼고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나는 그동안 썼던 시를 묶어 출판사에 보냈으나 답장이 없었다.


그리고 깃발 아래에서 K를 오랜만에 만났다.

직접 만든 깃발을 흔들며 웃고 있던 K는

응원봉을 들고 노래를 부르던 두 딸을 소개해 주었다.

행진을 마칠 무렵 K와 나는 헤어지며 다시 만나자고 했다.


그 거리에서 다시 만난 건 K가 아니라 새로운 나였다.

인간에 대해 많이 안다는 믿음이 겨울바람 속으로 날아갔다.

들꽃보다 화사한 깃발이 휘날리고

노을보다 화려한 불빛이 출렁이는 광장에서



- 유시민의 <문과 남자의 과학 공부>의 '나는 무엇인가'에 관한 부분을 읽다가 전두엽을 쿵 울리는 배움이 있었다. 인문학 독서모임과 부동산 공부모임에 관한 작가의 통찰이 놀라웠다. 독서모임을 이끌고 있다는 자부심으로, 재테크에만 열중하는 사람들에 대해 정신 승리를 해왔던 과거를 반성하게 되었다. 민주주의만큼 인간에 관한 공부도 어렵고 소중하다는 것을 느꼈다.


위에 적은 시는 사실 80%, 허구 20%로 구성했다. K가 내게 부동산 공부모임에 한 번 가보겠냐고 물었을 때, 거절하지 말 것 그랬다는 후회는 100% 사실이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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